도라지꽃 사연 / 법정 스님


무덥고 지루한 장마철이지만, 더러는 햇살이 비치고 밤으로 아주 드물게일지라도 영롱한 달빛과 별빛을 볼 수 있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어느 날 밤이던가. 침상에 누워 불을 끄고 잠을 청하려고 했을 때, 열어놓은 창문으로 둥근 달이 떠 있는 것을 보고 나는 벌떡 일어났다.

잠옷 바람으로 뜰에 나가 후박나무 아래 놓인 의자에 앉아 밤이 이슥하도록 혼자서 달마중을 했다. 그날 밤은 초가을처럼 하늘이 드높게 개어 달빛 또한 맑고 투명했다. 달빛을 베고 후박나무도 잠이 든 듯 미동도 하지 않다가, 한줄기 맑은 바람이 스치고 지나가면 모로 돌아눕듯 잎 새들이 살랑거렸다.

하늘에는 달빛에 가려 별이 희미하게 듬성듬성 돋아 있고, ‘쏙독 쏙독 쏙독쏙독새가 이슥한 밤을 울어 옜다. 쏙독새를 시골에서는 머슴새라고도 한다. 날이 저물도록 들녘에서 일을 하다가 머슴이 소를 몰고 돌아올 때 그 소몰이의 소리와 비슷한 데서 유래된 이름일 듯싶다.

달과 나무와 새와 맑고 서늘한 밤공기 속에서 나는 산신령처럼 묵묵히 앉아 조촐한 복을 누렸다. 홀로이기 때문에 이웃의 눈치를 볼 것도 없이, 자려다 말고 밖에 나와 달밤의 아늑하고 포근함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언젠가 옛사람의 시를 읽다가 다음과 같은 구절에 적잖은 충격을 받은 일이 있다.

 

꽃이 피고 지기 또 한해
평생에 몇 번이나 둥근 달 볼까?
 
花落花開又一年[화락화개우일년]
人生幾見月常圓[인생기견월상원]

 

이 시를 대하고 나서는 밤하늘에 떠 있는 달을 무심히 지나치고 싶지 않았다. 한평생 우리가 밤하늘에 떠 있는 둥근 달을 볼 수 있는 그 기회가 얼마나 될까? 물론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개는 세상일에 묻히거나 밀려, 달이 떠 있는지 마는지 놓치기 일쑤다. 어디 달뿐이겠는가. 철따라 피어나는 꽃도 그저 무심히 지나쳐버리는 수가 허다하다.

비록 물질적으로는 어렵고 가난하게 살았을망정, 옛사람들은 자연에 대한 이해와 사랑과 그 교감이, 온갖 것을 갖추고 편리하게 살아가는 현대의 우리들보다 훨씬 앞서 있었다. 우리 곁에 항상 주어져 있는 자연의 혜택도 우리가 받아들일 줄을 모르면 무연(無緣)한 것이 되고 만다.

이번 장마철에 도라지꽃의 생태를 지켜보면서 나는 생명의 신비에, 그리고 흙과 생명체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옷깃이라도 여미고 싶었다. 밭 한쪽에 심어놓은 도라지 밭에서 올 여름 들어 처음으로 꽃이 피어나던 날이었다. 그날따라 비바람이 휘몰아쳐, 꽃이 피어나자마자 한 가지가 빗줄기에 허리가 꺾였다. 고개를 들지 못한 꽃이 안쓰러워 유리컵에 담아 부엌의 식탁 위에 놓아두었다. 식탁 위에 꽃이 있을 때와 없을 때의 분위기는 아주 다르다. 식탁 위에 꽃이 있으면 혼자 앉아 있어도 누구와 함께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몇 개의 꽃망울이 맺힌 짙은 보랏빛 도라지꽃인데, 밭에서 피어 있던 송이가 이울고, 두 번째 송이가 피어날 때는 꽃빛깔이 처음 것보다 눈에 띄게 연했다. 셋째 송이는 보랏빛은 어디로 다 새어나가고 마치 핏기가 없는 얼굴처럼 아주 파리하게 피어났다. 모양만 도라지꽃이지 그 빛깔은 살아 있는 빛깔이 아니었다. 유리컵에서 꽃가지를 꺼내어 부엌 바깥 잡초 밭에 꽂아주었다. 놀라운 일은 여기에서 벌어졌다. 다음날 아침 부엌에 들어가다가 얼핏 보니, 그토록 파리하던 꽃에 다시 보랏빛 기운이 돌고 있었다. 그 이튿날 새로 피어난 꽃송이는 처음 밭에서 피어났을 때와 똑같은 짙은 보랏빛이었다.

내가 다년간 주방장으로 근무 중인 우리 부엌은 밀폐된 공간이 아니고 열어놓은 망창으로 햇살도 들어오고 바람도 드나들도록 되어 있다. 그리고 그 무렵에는 연일 비가 내려 햇빛도 볼 수 없던 때다. 유리컵에서 생기와 빛을 잃어버린 꽃가지를 흙에 꽂아 놓았을 때 다시 생기와 제 빛을 되찾은 걸 보고 흙이야말로 생명의 원천임을 통감할 수 있었다. 연탄가스에 어지간히 중독된 사람을 흙 위에 엎어놓으니 소생하더라는 말을 어떤 스님의 체험담으로 들은 일이 있다.

마른 씨앗을 흙 속에 뿌려놓으면 움이 트고 싹이 자란다. 곡식과 나무들이 여물고 꽃피우면서 열매 맺는 것도 흙의 은덕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모든 생물은 흙을 떠나서는 살지 못한다.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바뀌면서 우리들은 생명의 바탕인 흙의 은혜를 날이 갈수록 저버리고 있다. 흙을 의지하지 않고, 그 흙을 등지고 살아가는 생물이 이 지구상 어디에 존재하는가. 우리 인간이 흙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생물이라는 사실을 꿈속에서라도 잊지 말아야 한다.

요즘 책상 위에 놓아두고 자주 들춰보는 크리슈나무르티의 <마지막 일기>(1983년 캘리포니아의 오하이 계곡에 있는 그의 집에서 녹음기에 구술해 기록한 것)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들어 있다.

만약 우리가 자연, 살아 있는 나무들과 수풀과 꽃과 풀과 흘러가는 구름과 관계를 맺을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어떤 이유로도 결코 다른 사람을 죽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런 말도 하고 있다.

만약 우리가 자연과 깊고 지속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다면, 우리는 우리들의 식욕을 채우기 위해 결코 동물들을 죽이지 않을 것이다.”

<버리고 떠나기 / 1990.7.>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