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 빈 충만 책 머리에 / 법정 스님
요즘 나는 오전 한때를 후박나무 그늘에 앉아 조촐하고 맑은 시간을 보내면서 나무의 덕을 입고 있다. 그 그늘 아래서 아무 생각 없이 무심無心을 익히고 책도 읽으며, 잎 사이로 지나가는 살랑거리는 바람소리도 듣고, 은은히 숨결에 스며드는 꽃향기도 듣는다.
꽃향기는 코로 맡는 것이 아니라 듣는다[聞香]고 하는 옛 표현이 훨씬 운치 있고 적절하다. 꽃에다 코를 대고 씽씽 맡는 것은 짐승스런 몸짓이며, 꽃에 대해서 결례가 될 것이다. 내 문법대로라면 냄새는 맡고 향기는 듣는다. 바람결에 은은히 묻어오는 그 향기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고개를 들면 후박나무 잎 사이로 흘러가는 구름도 보이고, 그 그늘 아래서 꾀꼬리며 밀화부리, 찌르레기, 호반새 등의 맑은 목청에 귀를 모으기도 한다. 책을 읽다가 잠시 덮어두고 나무를 쳐다보기도 하고, 눈감고 좌정한 채 새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문득 이 후박나무에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15년 전 이 묘목을 갖다가 심을 때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일인데, 그새 이렇게 자라서 시원하고 향기로운 그늘을 드리워주고 있구나 생각하니 나무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수목을 비롯한 식물들은 이렇듯 공을 들인 것에 보답이 따른다. 나무들은 결코 신의를 저버리지 않는다.
이런 나무의 그늘에 견줄 때 우리들 사람의 그늘은 얼마나 엷고 빈약한가. 사람의 그늘은 덕인데, 눈앞의 사소한 이해타산에 걸려 덕의 그늘을 펼칠 줄을 모른다.
그 환경이 어디건 간에 관계의 고리에서 벗어나 홀로 살기를 선택한 사람들은, 어쩌면 이런 나무처럼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어디에도 기대지 않고, 홀가분하게 그리고 정정하게 살고 싶어서인지 모른다. 나무를 심고 가꾸기를 즐겨했던 옛사람들의 뜻을 조금은 알 것 같다.
내게는 어제 오늘 걱정거리가 하나 생겼다. 뒷마루 상자 속에 새끼를 친 어미 박새가 어찌된 일인지 돌아오지 않고 있다. 둥지 곁을 지날 때마다 내 발자국 소리에 어린 새끼들이 어민가 해서 짹짹거린다. 배가 고파서 애타게 어미를 기다리고들 있다.
한 보름 전 뒷마당을 쓸고 있는데, 마루 끝에 놓아둔 종이상자 속에서 푸드득 박새가 놀라 날아갔다. 조심스레 다가가 들여다보았더니 알을 여섯 개나 낳아놓았었다. 이 박새는 전에도 신문지를 담아놓은 상자 속에 알을 낳아 새끼를 친 적이 있다.
며칠 전 그 상자 속에서 어린 새소리가 들리기에 살며시 들여다보니 여섯 마리의 박새 새끼가 고스란히 부화되어 있었다. 탈 없이 부화된 것을 보고 다행이다 싶었다. 그런데 어제 아침 하도 짹짹거리기에 신경이 쓰여 가보았더니, 겨우 털이 돋기 시작한 그 어린것들이 배가 고파 입을 벌리고 어미를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어제 오늘 종일을 지켜봐도 어미 새는 어디 가서 잘못되었는지 둥지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는다. 대개는 암수 한 쌍이 있어 한쪽에서 먹이를 물러 나가면 다른 한쪽은 둥지를 지키는 것이 상례인데, 그 집은 어찌된 영문인지 내가 처음 보았을 때부터 어미 새 한 마리뿐이었다.
조금 전에 들여다보니 그 애들은 기진맥진한 채 제대로 운신도 못하고 있었다. 짐승의 목숨이나 사람의 목숨이나 살려고 하는 그 생명의 바탕은 결코 다를 수 없다. 태어나자마자 어미를 잃고 굶어서 죽어야 하다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목숨의 뿌리는 같아도 부류가 다르므로 나는 어떻게 손을 써볼 수도 없다.
생명을 수단으로 여기는 것은 그 어떤 세상에서일지라도 돌이킬 수 없는 악이다. 오늘날 지구촌 곳곳에서 사람의 목숨을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무참하게 살해하는 것은 참으로 두렵고 참담하기 그지없다. 사람의 손으로 같은 사람을 살육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끔찍한 일이다. 살려고 태어난 이 우주의 신비를 누가 무슨 권리로 꺾는단 말인가.
엊그제 광주에 나갔다가 도청 앞 광장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돌멩이와 유리조각을 보면서, 우리 시대의 한 단면을 대하는 것 같아 마음이 착잡하고 우울했다.
산문 안과 산문 밖의 현실이 이처럼 현격함에 나는 적잖은 갈등과 자책을 느낄 때가 있다. 누구나 같은 목청으로 외쳐댈 수는 없지만, 우리 시대의 아픔은 곧 우리 모두의 아픔이므로 함께 나누어 갖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상황 속에서 잡문집을 내려고 하니 마음이 무겁다. 이 책이 나오도록 애써준 출판사(샘터)와 좋은 그림을 그려준 송영방 화백에게 감사를 드린다.
1989년 6월 水流花開室에서
法 頂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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