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리고 떠나기 / 법정 스님

뜰가에 서 있는 후박나무가 마지막 한 잎마저 떨쳐버리고 빈가지만 남았다. 바라보기에도 얼마나 홀가분하고 시원한지 모르겠다. 이따금 그 빈 가지에 박새와 산까치가 날아와 쉬어간다.

부도 앞에 있는 벚나무도 붉게 물들었던 잎을 죄다 떨구고 묵묵히 서 있다. 우물가 은행나무도 어느새 미끈한 알몸이다.

잎을 떨쳐버리고 빈 가지로 묵묵히 서 있는 나무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내 자신도 떨쳐버릴 것이 없는지 되돌아보게 된다. 나무들에 견주어볼 때 우리 인간들은 단순하지 못하고 순수하지 못하며, 건강하지도 지혜롭지도 못한 것 같다. 그저 많은 것을 차지하려고만 하고, 걸핏하면 서로 미워하고 시기하면서 폭력을 휘두르려 하며, 때로는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한 채 콕 막혀 어리석기 짝이 없다.

오늘 오후, 옷깃을 여미게 할 만큼 바람끝이 쌀쌀하고 잔뜩 찌푸린 날씨였다. 산을 오르기로 했다. 산에 사는 사람이 산을 오른다고 하니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산속에서도 오를 산은 얼마든지 있다. 그래서 첩첩 산이라고 하지 않던가.

뒷등성이로 올라 오리나무 숲을 찾아갔다. 오리나무 숲도 잎들을 어지간히 떨쳐버리고 옹기종기 모여 겨울 채비를 하고 있었다. 훨훨 벗어버린 나목裸木의 숲속을 거닐고 있으면, 이상하게도 아주 포근하고 따뜻하게 나무들의 체온이 다가선다. 잎을 무성하게 달고 있을 때는 그런 걸 느낄 수 없었는데, 빈 가지로 서있는 나무들에서 도리어 따뜻함을 감촉할 수 있다.

사람도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것저것 많이 차지하고 있는 사람한테서는 느끼기 어려운 그 인간미를, 조촐하고 맑은 가난을 지니고 사는 사람한테서 훈훈하게 느낄 수 있다.

이런 경우의 가난은 주어진 빈궁貧窮이 아니라, 자신의 분수와 그릇에 맞도록 자기 몫의 삶을 이루려는 선택된 청빈淸貧일 것이다. 주어진 가난은 악덕이고 부끄러움일 수 있지만, 선택된 그 청빈은 결코 악덕이 아니라 미덕이다.

오늘과 같은 세상에서 안빈낙도安貧樂道를 이야기한다면 다들 코웃음을 치겠지만, 옛 우리네 선비들은 세상의 부와 명예와 권력에 연연하지 않고 자기 나름의 세계를 가꾸면서 맑고 조촐한 삶을 넉넉하게 이루었던 것이다. 누구나 다 그럴 수는 없겠지만, 투철한 인생관을 지니고 자신의 전문 분야에서 삶을 불태우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선비 정신과 꿋꿋한 기상이 일상의 저변에 깔려 있어야 한다.

무엇이든지 차지하고 채우려고만 하면 사람은 거칠어지고 무디어진다. 맑은 바람이 지나갈 여백이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함께 사는 이웃을 생각하지 않고 저마다 자기 몫을 더 차지하고 채우려고만 하기 때문에 갈등과 모순과 비리로 얽혀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개인이나 집단이 정서가 불안정해서 삶의 진실과 그 의미를 놓치고 있는 것이다.

버리고 비우는 일은 결코 소극적인 삶이 아니라 지혜로운 삶의 선택이다.

버리고 비우지 않고는 새것이 들어설 수 없다. 그러므로 차지하고 채우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침체되고 묵은 과거의 늪에 갇히는 것이나 다름이 없고, 차지하고 채웠다가도 한 생각 돌이켜 미련 없이 선뜻 버리고 비우는 것은 새로운 삶으로 열리는 통로다.

만약 나뭇가지에 묵은 잎이 달린 채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않고 있다면 계절이 와도 새잎은 돋아나지 못할 것이다. 새잎이 돋아나지 못하면 그 나무는 이미 성장이 중단되었거나 머지않아 시들어 버릴 병든 나무일 것이다. 소나무 향나무 대나무와 같은 상록수도 눈여겨 살펴보면 계절이 바뀔 때마다 묵은 잎을 떨구고 새잎을 펼쳐낸다. 늘 푸르게 보이는 것은 그 교체가 낙엽수처럼 일시적이 아니고 점진적이기 때문이다.

잎이 말끔히 저버린 후박나무와 은행나무는 그 빈 자리에 내년에 틔울 싹을 벌써부터 마련하고 있다. 이런 현상이 바로 생태계의 자연스런 리듬일 것이다. 이런 리듬이 없으면 삶은 지루하고 무료하고 무의미해 진다. 이래서 자연은 우리에게 위대한 교사다.

그런데 유달리 우리들 인간만이, 특히 요즘의 우리들만이 자연의 질서를 등지고 거역할 뿐 아니라 도리어 파괴하려고 드는 데는 원초적인 문제가 있다. 가을이 지나가고 겨울이 오는 것을, 단순히 계절의 순환으로만 받아들여서는 안 될 것이다. 비본질적인 삶의 부스러기들을 털고 버림으로써 본질적인 삶을 이룰 수 있다는 암시요, 계시로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자연의 교사로부터 배우려면 따로 학습이나 예습이 필요 없다. 더구나 과외공부 같은 것은 도리어 방해가 된다. 그저 아무 생각이 없는 빈 마음으로 묵묵히 바라보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흙을 가까이하면서 나무들을 매만지고 쓰다듬으며 가지 끝에 열려 있는 하늘을 이따금 쳐다보아야 한다. 하늘은 툭 트인 무한한 우주공간을 우리에게 안겨줌으로써, 어느 국지局地에 매달리거나 안주하려는 그 집착으로부터 벗어나게 한다.

우리들 삶의 현장에 막힌 벽만 있고 툭 트인 공간이 없다면 인간의 의식은 생기를 잃고 이내 시들어 버릴 것이다. 여백은 이래서 본질을 새롭게 인식시켜준다. 의식의 개혁이란 이미 있는 것에 대한 변혁이 아니라, 그 공간과 여백에서 찾아낸 새로운 삶의 양식이다. 의식의 개혁 없이 새로운 삶은 이루어질 수 없다.

잎이 져버린 오리나무 숲에서 이런 가르침을 들으면서 아주 신선한 오후의 한때를 보낸 것은, 오늘 하루 내 삶의 보람이 아닐 수 없다. 나무줄기를 쓰다듬으니 거칠거칠한 그 속에서도 여리디여린 부드러움이 있다. 거칠고 살벌한 이 풍진 세상에서도 우리 안에는 원천적으로 여리고 부드러움이 내재되어 있다는 소식일까.

산마루에 올라 첩첩이 싸인 먼 산을 바라본다. 아래서 올려다 볼 때와는 달리 시야가 툭 트이니 내 마음도 트이는 것 같다. 보다 멀리고 내다보려면 다시 한층 더 높이 올라가라는 옛말이 실감이 난다.

우리 옛 그림에 선비가 언덕에 올라 뒷짐을 지고 멀리 내다보는 풍경이 더러 있다. 얼핏 보면 무료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유심히 보면 그 안에 삶의 운치와 여유와 지혜가 들어있다.

도시의 빌딩에서 내다보이는 전경은 또 다른 빌딩일 뿐이다. 도시에는 여백이 별로 없이 그저 빽빽이 들어찬 과밀뿐이다. 따라서 삶의 여백 또한 지니기 어렵다. 여백이 없는 사유思惟는 자칫 환상이나 망상으로 치닫기 쉽다. 도시의 온갖 범죄도 이런 데서 연유되지 않을까 싶다.

공간이나 여백은 그저 비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 공간과 여백이 본질과 살상을 떠받쳐주고 있다.

일상의 소용돌이에서 한 생각 돌이켜 선뜻 버리고 떠나는 일은 새로운 삶의 출발로 이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비슷비슷한 되풀이로 찌들고 퇴색해가는 범속한 삶에서 뛰쳐나오려면, 나무들이 달고 있던 잎을 미련 없이 떨쳐버리는 그런 결단과 용기가 있어야 한다.

한 해가 기우는 마지막 달에 자기 몫의 삶을 사고 있는 우리는 저마다 오던 길을 한번쯤 되돌아볼 수 있어야 한다. 지금까지의 삶에 만족하고 있다면 그는 새로운 삶을 포기한 인생의 중고품이나 다름이 없다.

그의 혼은 이미 빛을 잃고 무디어진 것이다. 우리가 산다는 것은 끝없는 탐구이고 시도이며 실험이다.

그런데 이 탐구와 시도와 실험이 따르지 않는 삶은 이미 끝난 것이나 다름이 없다.

자연의 리듬은 멈추거나 끝나는 일이 절대로 없다. 자연은 스스로를 정화하면서 가장 자연스럽게 존재한다. 우리 인간도 먹는 것, 입는 것, 생각하고 활동하는 것, 대인관계 등에 억지나 과시나 허세가 없이 지극히 자연스러워야 한다. 자연스러움이 곧 건전한 삶을 이룬다.

이제 나는 자취생활이 지겨워 묵은 둥지에서 떠나보기로 했다. 올 겨울은 히말라야를 찾아가 새로운 삶을 시작해보고 싶다. 내 삶은 그 누구도 아닌 내 자신이 가꾸어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198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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