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숙蹇叔, 건숙여력蹇叔膂力, 건숙기이릉蹇叔期二陵
❍ 건숙[蹇叔] 춘추 시대 진(秦)나라의 재상으로 부국강병의 큰 공로를 세웠다. 원래 송(宋)나라 출신으로 백리해(百里奚)의 친구였는데, 후에 진나라로 가서 백리해가 진 목공(秦穆公)에게 추천하여 재상이 되었다. 진 목공은 건숙과 천하의 형세를 논하면서 너무나 즐거워 밥 먹는 것도 잊을 정도였다고 한다. 진 목공은 건숙을 우상(右相)으로 백리해를 좌상(左相)으로 임명하여 부국강병을 이루었다.
❍ 건숙여력[蹇叔膂力] 건숙(蹇叔)은 송(宋)나라 사람이다. 백리해(百里奚)가 목공(穆公)에게 추천하자 송(宋)나라에서 맞이하여 대부(大夫)로 삼았다. 진(秦)나라에서 벼슬하여 대부가 되었고, 목공(穆公)을 보좌하여 패자가 되게 하였다. 진목공(秦穆公)이 건숙(蹇叔)과 백리해(百里奚)의 간언(諫言)을 듣지 않고 정(鄭)나라를 침범했다가 진(晉)나라 군사에게 참패를 당하고 장수 세 사람이 포로로 잡히기까지 하였는데, 그 뒤에 이것을 후회하며 군사들 앞에서 맹세를 한 진서(秦誓)의 글이 서경(書經)에 전한다. 그중에 “그렇긴 해도 앞으로는 이 백발의 원로들에게 자문을 구할 것이니, 그렇게 하면 잘못된 일이 없게 될 것이다.[尙猷詢茲黃髮 則罔所愆]”라는 내용이 있다. 사기(史記) 권5 진본기(秦本紀)에 “진 목공(秦穆公)이 맹명(孟明)·서걸술(西乞術)·백을병(白乙丙) 등 세 장수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진(晉)나라를 정벌하도록 하였는데, 그때 진 문공(晉文公)의 초상(初喪)이 나 아직 장사를 치르지 않았다. 태자 양공(襄公)이 노하며 말하기를 ‘진(秦)나라가 나를 업신여겨 초상이 난 기회를 이용해 우리 활(滑) 땅을 격파하려고 한다.’라 하고, 상복 차림으로 군대를 이끌고 효(殽)로 나가 진(秦)나라 군대를 요격하여 크게 깨뜨리고 세 장수를 사로잡아 돌아갔다. 그 뒤에 진나라가 세 장수를 돌려보내자 진 목공이 소복을 입고 교외로 나가 영접하고 울면서 말하기를 ‘내가 백리해(百里傒)·건숙(蹇叔)의 말을 듣지 않아 세 장군을 욕되게 하였다. 세 장군이 무슨 죄가 있겠는가? 그대들은 마음을 다해 치욕을 씻되, 게을리 하지 말라.’라고 하고, 세 사람의 관작을 회복해 주고 더욱더 후하게 대우하였다. 그 뒤에 진 목공이 맹명 등으로 하여금 진(晉)나라를 정벌하도록 하니, 맹명이 황하(黃河)를 건너가 진나라 군사를 크게 격파하고 왕관(王官)과 호(鄗)를 점령하였다. 진나라 사람들이 성만 지키고 감히 나오지 못하자, 진 목공이 모진(茅津)에서 황하를 건너 효로 가 전사한 사졸의 시체를 묻어주고 돌아갔다.”라고 하였다.
❍ 건숙기이릉[蹇叔期二陵] 건숙(蹇叔)은 춘추시대 진 목공(秦穆公)을 도와 패자가 되게 한 명신(名臣)이다. B.C. 628년 진(秦)나라의 대부였던 기자(杞子)가 정(鄭)나라에 있으면서 사람을 보내 목공(穆公)에게 고하기를 “정(鄭)나라가 나로 하여금 북문(北門)의 자물쇠를 관장하게 하였으니, 만일 군대를 은밀히 출동하면 정나라를 얻을 수 있다.”고 하자, 목공(穆公)이 이 일을 건숙(蹇叔)과 상의하였다. 건숙(蹇叔)이 극력 반대하였으나 목공은 이를 물리치고 마침내 맹명(孟明) 등으로 하여금 정나라를 공격하게 했다가 진 양공(晉襄公)에게 효산(殽山)에서 대패하였는바, 이때 건숙(蹇叔)이 출전하는 자신의 아들에게 울며 말하기를 “진(晉)나라 장수는 반드시 우리 군대를 효산(殽山)에서 막을 것이다. 효산에는 두 언덕[二陵]이 있는데, 남쪽 언덕은 하후(夏后) 고(皐)의 무덤이 있는 곳이고, 북쪽 언덕은 문왕(文王)이 풍우(風雨)를 피했던 곳이다. 네가 반드시 이 두 언덕 사이에서 죽을 것이니, 내가 그곳으로 가서 너의 시신을 거두리라.”라고 하였는데, 그 후 과연 그의 말대로 되었다. <春秋左氏傳 僖公 3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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