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숙蹇叔, 건숙여력蹇叔膂力, 건숙기이릉蹇叔期二陵

건숙[蹇叔 춘추 시대 진()나라의 재상으로 부국강병의 큰 공로를 세웠다. 원래 송()나라 출신으로 백리해(百里奚)의 친구였는데, 후에 진나라로 가서 백리해가 진 목공(秦穆公)에게 추천하여 재상이 되었다. 진 목공은 건숙과 천하의 형세를 논하면서 너무나 즐거워 밥 먹는 것도 잊을 정도였다고 한다. 진 목공은 건숙을 우상(右相)으로 백리해를 좌상(左相)으로 임명하여 부국강병을 이루었다.

건숙여력[蹇叔膂力 건숙(蹇叔)은 송()나라 사람이다. 백리해(百里奚)가 목공(穆公)에게 추천하자 송()나라에서 맞이하여 대부(大夫)로 삼았다. ()나라에서 벼슬하여 대부가 되었고, 목공(穆公)을 보좌하여 패자가 되게 하였다. 진목공(秦穆公)이 건숙(蹇叔)과 백리해(百里奚)의 간언(諫言)을 듣지 않고 정()나라를 침범했다가 진()나라 군사에게 참패를 당하고 장수 세 사람이 포로로 잡히기까지 하였는데, 그 뒤에 이것을 후회하며 군사들 앞에서 맹세를 한 진서(秦誓)의 글이 서경(書經)에 전한다. 그중에 그렇긴 해도 앞으로는 이 백발의 원로들에게 자문을 구할 것이니, 그렇게 하면 잘못된 일이 없게 될 것이다.[尙猷詢茲黃髮 則罔所愆]”라는 내용이 있다. 사기(史記) 5 진본기(秦本紀)진 목공(秦穆公)이 맹명(孟明서걸술(西乞術백을병(白乙丙) 등 세 장수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진()나라를 정벌하도록 하였는데, 그때 진 문공(晉文公)의 초상(初喪)이 나 아직 장사를 치르지 않았다. 태자 양공(襄公)이 노하며 말하기를 ()나라가 나를 업신여겨 초상이 난 기회를 이용해 우리 활() 땅을 격파하려고 한다.’라 하고, 상복 차림으로 군대를 이끌고 효()로 나가 진()나라 군대를 요격하여 크게 깨뜨리고 세 장수를 사로잡아 돌아갔다. 그 뒤에 진나라가 세 장수를 돌려보내자 진 목공이 소복을 입고 교외로 나가 영접하고 울면서 말하기를 내가 백리해(百里傒건숙(蹇叔)의 말을 듣지 않아 세 장군을 욕되게 하였다. 세 장군이 무슨 죄가 있겠는가? 그대들은 마음을 다해 치욕을 씻되, 게을리 하지 말라.’라고 하고, 세 사람의 관작을 회복해 주고 더욱더 후하게 대우하였다. 그 뒤에 진 목공이 맹명 등으로 하여금 진()나라를 정벌하도록 하니, 맹명이 황하(黃河)를 건너가 진나라 군사를 크게 격파하고 왕관(王官)과 호()를 점령하였다. 진나라 사람들이 성만 지키고 감히 나오지 못하자, 진 목공이 모진(茅津)에서 황하를 건너 효로 가 전사한 사졸의 시체를 묻어주고 돌아갔다.”라고 하였다.

건숙기이릉[蹇叔期二陵]  건숙(蹇叔)은 춘추시대 진 목공(秦穆公)을 도와 패자가 되게 한 명신(名臣)이다. B.C. 628년 진()나라의 대부였던 기자(杞子)가 정()나라에 있으면서 사람을 보내 목공(穆公)에게 고하기를 ()나라가 나로 하여금 북문(北門)의 자물쇠를 관장하게 하였으니, 만일 군대를 은밀히 출동하면 정나라를 얻을 수 있다.”고 하자, 목공(穆公)이 이 일을 건숙(蹇叔)과 상의하였다. 건숙(蹇叔)이 극력 반대하였으나 목공은 이를 물리치고 마침내 맹명(孟明) 등으로 하여금 정나라를 공격하게 했다가 진 양공(晉襄公)에게 효산(殽山)에서 대패하였는바, 이때 건숙(蹇叔)이 출전하는 자신의 아들에게 울며 말하기를 ()나라 장수는 반드시 우리 군대를 효산(殽山)에서 막을 것이다. 효산에는 두 언덕[二陵]이 있는데, 남쪽 언덕은 하후(夏后) ()의 무덤이 있는 곳이고, 북쪽 언덕은 문왕(文王)이 풍우(風雨)를 피했던 곳이다. 네가 반드시 이 두 언덕 사이에서 죽을 것이니, 내가 그곳으로 가서 너의 시신을 거두리라.”라고 하였는데, 그 후 과연 그의 말대로 되었다. <春秋左氏傳 僖公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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