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계建溪, 건계乾谿, 건계지난乾谿之亂, 건계지화乾谿之禍

건계[建溪]  복건성(福建省) 포계현(浦溪縣)에 흐르는 강인데, 민강(閩江)의 근원이 된다. ()은 주희의 고향이기 때문에 주희는 이 강 이름을 호로 하였다.

건계[建溪 중국 복건성(福建省)에 있는 차의 명산지로 뒤에 차의 이명(異名)으로 불렸다. 민강(閩江)의 북쪽 원류로 차() 생산지 무이산(武夷山)을 지나 민강(閩江)에 합류한다.

건계[建溪 지명이며 또한 계곡을 흐르는 물 이름이다. 북원(北苑)은 명차의 산지로 유명하며 그 차는 건차(建茶)로 불린다. 허혼(許渾)의 시 방원(放猿)산빛이 옅어지면 무협을 떠올리고, 물이 차가워지면 건계를 생각하네.[山淺憶武峽 水寒思建溪]”라고 하였다.

건계[乾谿]  건계(乾谿)는 춘추시대 초()나라의 동쪽 지역에 있는 땅 이름으로, 지금의 안휘성(安徽省) 박현(亳縣) 남동쪽에 있다. 초 영왕(楚靈王)이 이곳에 대()를 짓고는 방탕하게 놀다가 자신의 동생인 공자(公子) ()의 반란으로 인해, 산속을 방황하며 굶주림에 시달리다가 목을 매어 자살하였다.

건계[乾谿 하남성(河南省) 상수현(商水縣)에 있는 대명(臺名)으로, 춘추 시대 초 영왕(楚靈王)이 무도하여 백 길 높이의 건계대를 짓고 극도의 사치를 누렸다고 한다.

건계지난[乾谿之亂]  노소공(魯昭公) 13(기원전 529)에 초 영왕(楚靈王)이 건계(乾谿)에 나와 있는 사이에 공자(公子) ()와 공자(公子) 기질(棄疾) 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자살한 일을 이른다. 건계(乾谿)는 춘추 시대 초()나라의 땅인 안휘성(安徽省) 박현(亳縣)에 있는 지명이다. 초 영왕(楚靈王)이 사치하여 이곳에다 장화대(章華臺)를 건설하고는 죄인들이 장화대로 도망해 들어오면 잡지 못하게 하였으며, 자신이 죽인 사람의 아들에게 국도(國都)의 수비를 맡기기도 하였다. 초 영왕이 정사를 버려둔 채 자주 놀러 나가자 윤자혁(尹子革)이 자주 간하니, 영왕이 깨닫고는 3일 동안 바깥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러나 영왕은 끝까지 이 결심을 지키지 못하고 건계의 대에서 방탕하게 놀다가 자신의 동생인 공자(公子) ()의 반란을 일으켜 국도를 함락시키자, 산속을 방황하며 굶주림에 시달리다가 내가 남의 자식을 죽였으니 화를 면할 수 있겠는가.”라 하고는 목을 매어 자살하였다. <春秋左氏傳 昭公13><國語 楚語>

건계지화[乾谿之禍]  초 영왕(楚 靈王)이 사치하여 건계(乾谿)에 장화대(章華臺)를 건설하고는 죄인들이 장화대로 도망해 들어오면 잡지 못하게 하였으며, 자신이 죽인 사람의 아들에게 국도(國都)의 수비를 맡기기도 하였다. 그 후 영왕이 건계에 머물면서 사치를 부리자, ()나라 사람이 반란을 일으켜 국도를 함락시키자 영왕은 떠돌며 굶주림에 시달리다가 자살하였다. <國語 楚語>

건계지화[乾谿之禍 춘추집의(春秋集義), 춘추집전미지(春秋集傳微旨), 사기(史記) 초세가(楚世家) 등에 의하면 초 영왕(楚靈王)은 밖으로는 군사를 출동하여 외국을 정벌하고, 안으로는 백성을 동원하여 건계(乾谿)에 장화대(章華臺) 같은 건물을 지어 사치를 누리니 안팎의 민심이 이반하였다. 그가 나라를 비우고 건계(乾谿)에서 장기간 호화스런 생활을 하는 동안, ()나라에 망명해 있던 초()나라 공자(公子) ()가 그 틈을 타서 진()나라의 힘을 업고 입국하여 건계(乾谿)를 소탕하자, 영왕(靈王)은 산중으로 도망했다가 끝내 목매어 자살하였다.”고 한다. 곽숭도론(郭崇韜論)에서 소철(蘇轍)초 영왕(楚靈王)은 백성들을 괴롭혀 자기 욕심을 채우고, ()을 일으킬 생각을 품은 백성들을 동원해서 오()나라를 정벌하였으니, ()나라는 요동시킬 수 없었고 기질(棄疾)이 초()나라를 공격하기를 마치 무인지경을 들어가듯이 하여 영왕(靈王)은 결국 밖에서 죽었다.[楚靈王殘民以逞 擧思亂之民以伐吳 吳不可動 而棄疾攻之 若升虛邑靈王遂死於外]”라고 적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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