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안사인建安詞人, 건안체建安體, 건안칠자建安七子, 건안풍골建安風骨, 건안황초建安黃初, 건암健菴, 건액巾額

건안사인[建安詞人]  중국(中國) 후한(後漢) 건안 때의 문장가(文章家)들을 이른다. 건안칠자(建安七子)의 다른 이름이다.

건안섭씨[建安葉氏]  섭식(葉湜). ()나라 건안(建安). 이름은 식(). 자는 자시(子是). 벼슬은 안인령(安仁令). 장년에 주희(朱熹)의 문인이 되었다. 진덕수(眞德秀)는 그가 벼슬을 할 때 빼어난 절개를 지녔다고 했다.

건안섭씨[建安葉氏]  이름은 채()이고 자는 중규(仲圭)이니, 근사록(近思錄)의 주()를 내었다.

건안자[建安子]  후한 헌제(獻帝) 때인 건안(建安) 연간에 조조(曹操]) 부자 밑에서 활약한 문학집단 가운데 특히 뛰어난 재자(才子) 7인인 건안칠자(建安七子)를 말하는데, 공융(孔融: 자 문거文擧진림(陳琳: 자 공장孔障왕찬(王粲: 자 중선仲宣서간(徐幹: 자 위장偉長완우(阮瑀: 자 원유元瑜응창(應瑒: 자 덕련德璉유정(劉楨: 자 공간公幹)이 바로 그 사람이다. 이들은 업하칠자(鄴下七子)라고도 하는데 삼조(三曹)의 위성(衛星)으로서, 신흥 업도(鄴都)에서 20년 동안 활발히 시작(詩作)을 했다. 그 중에도 왕찬·유정이 뛰어났으며 이 집단이 5언시의 발전과 문학의 서정화에 이룩한 공이 매우 크다.

건안체[建安體 건안은 한나라 헌제(獻帝)의 연호로, 전체적으로 후한 시대를 칭한다. 이 시기에는 이른바 건안칠자(建安七子: 업중칠자鄴中七子)로 불리던 공융(孔融), 진림(陳琳), 왕찬(王粲), 서간(徐幹), 완우(阮瑀), 응양(應㻛), 유정(劉楨)과 조조(曹操), 조비(曹丕) 등이 문장을 과시하였는데, 이들은 백성들의 고달픈 삶에 대해 비분강개하는 강건한 시풍을 가지고 있었다. 후대에는 특별히 이들의 문장을 건안체(建安體)라고 칭하였다.

건안체[建安體]  (() 교체기에 조조(曹操) 부자와 건안칠자(建安七子) 가 창작한 시문체이다. 시경(詩經)과 한나라 악부 민가(樂府民歌)의 현실주의 전통을 계승하여 당대 사회의 동란(動亂)과 민생의 고통을 반영하는 등 강개한 분위기와 강건한 풍격이 있었다.

건안칠자[建安七子 건안(建安)은 후한(後漢) 헌제(獻帝)의 연호(年號)이다. 건안칠자(建安七子)는 이때 활약한 일곱 명의 문사(文士)이다. 조비(曹丕)의 전론(典論)에 의하면, 노국(魯國)의 공융(孔融), 광릉(廣陵)의 진림(陳琳), 산양(山陽)의 왕찬(王粲), 북해의 서간(徐幹), 진류(陳留)의 완우(阮瑀), 여남(汝南)의 응창(應瑒), 동평(東平)의 유정(劉楨) 7명이다. 이들은 조조가 권력을 잡은 업(:하남성)에 모여, 조비·조식(曹植) 형제와 더불어 중국에서 가장 일찍 자각적인 문학집단을 형성하였다. 종래의 부() 대신 시(), 특히 오언시(五言詩)를 문학의 주류로 삼아, 뒤의 중국문학의 선구를 이룬 점, 민요라 할 수 있는 악부체(樂府體)의 시를 지식인의 서정시로 완성한 점, 종래의 유가적(儒家的) 취향을 벗어나 시문학에 강렬한 개성과 청신한 격조를 부여한 점 등은 그 성과이며 특징으로 꼽힌다.

건안칠자[建安七子]  중국 후한 말기, 헌제의 건안 연간에 위나라의 조조 부자를 중심으로 활약하였던 문학집단 가운데 7명의 시문가로 공융(孔融), 진림(陳琳), 왕찬(王粲), 서간(徐幹), 완우(阮瑀), 응창, 유정(劉楨) 등으로, 당시 시재에 뛰어났던 삼조(三曹) 즉 위나라의 조조, 그 아들 조비(曹丕), 조비의 동생 조식(曹殖)을 중심으로 신흥도시 업(: 하남성)에서 20년 동안 왕성한 시작 활동을 하였다. 이들 중 특히 산양의 왕찬과 동평의 유정이 뛰어났는데 이들이 형성한 문학집단이 사부를 오언시로 발전시켰고 문학을 서정화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건안칠자는 종래의 유교적 틀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개성과 새로운 격조를 시문학에 도입하였으며, 품격이 고상한 이들의 시체, 즉 건안체(建安體)는 육조 때까지 계속 성행하였다. 조식(曹植)의 전론(典論) 논문(論文)에 보인다. 업중칠자(鄴中七子).

건안풍골[建安風骨]  건안(建安)은 후한(後漢) 시대 마지막 황제인 헌제(獻帝)의 연호이다. 이 시기엔 조조(曹操조비(曹丕조식(曹植) 그리고 건안 칠자(建安七子) 등의 문인들이 활약하여 수많은 문학작품을 저술하였다. 그 문풍이 호방하고 굳건하여 건안풍골(建安風骨)이라고 부른다. 후세에 시문의 전범으로 삼았다.

건안황초[建安黃初]  건안은 후한(後漢) 헌제(獻帝)의 연호이며, 황초(黃初)는 위 문제(魏文帝)의 연호이다. 건안과 황초의 연대는 서기 196년에서 226년까지에 이르며, 이 시기에 조식(曹植) 부자를 위시한 많은 시인이 나서 이 시풍을 건안체(建安體)라 하였다.

건암[健菴]  건암은 청() 나라 때의 서건학(徐乾學)의 호인데 독례통고(讀禮通考)를 저술하였다.

건액[巾額]  두건 앞부분의 이마를 덮는 곳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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