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락사현去樂辭顯, 거락출위居樂出威, 거란契丹, 거란미가여쟁자칠契丹未可與爭者七, 거란장契丹場, 거란해契丹奚

거락사현[去樂辭顯]  안락한 생활을 그만두고 높은 지위에서 물러남. ()은 이름이 널리 드러나는 높은 벼슬자리를 뜻한다.

❍ 거락출위[居樂出威]  거락(居樂)은 어머니가 안에 있는 것이고출위(出威)는 진()이 밖에 있는 것이다안에 거처하면서 즐겁기 때문에 제후를 세우는 것이 이롭고위엄을 나타내기 때문에 군대를 출동함이 이로운 것이다. <國語 晉語>

거란[契丹]  원래 거란족은 퉁구스계와 몽골계의 혼혈족으로 구성된 유목민족으로 5세기 이래로 요하(遼河) 유역에 거주하였는데 당나라 말기 중원지역이 혼란에 빠지자 916년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가 주변 부족을 통합한 다음 거란을 건국하여 황제를 호칭했다. 이후 중원(中原)으로 진출, 화북지역을 장악한 다음 946년 국호를 요()로 개칭하였다.

거란미가여쟁자칠[契丹未可與爭者七]  거란과 다투어서는 안 되는 점 7가지. 구오대사(舊五代史) 상유한전(桑維翰傳)에 상세한 내용이 보인다. 첫 번째는 거란(契丹)의 국력이 한창 강성하여 강토는 넓고 백성은 많으며 군비(軍備)는 완비되고 전마(戰馬)는 많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거란의 군대는 한창 승기(勝機)를 탔고 중원(中原)의 군대는 아직 사기도 미약하고 훈련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고, 세 번째는 아직 거란이 먼저 맹약(盟約)을 저버린 일이 없는데 먼저 맹약을 파기하면 명분을 잃는다는 것이고, 네 번째는 병사를 움직일 때 상대방의 틈을 보고 움직여야 하는데 아직 거란에는 그러한 틈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고, 다섯 번째는 멀리 황폐한 땅으로 출정하여 비바람을 무릅쓰고 배고픔도 이겨내는 것은 중원의 군사가 잘하지 못하는 일이라는 것이고, 여섯 번째는 거란의 병사는 모두 기병(騎兵)이고 중원의 군사는 보병(步兵) 위주인데 전쟁이 일어나면 조위(趙魏) 지방은 평지가 많으므로 절대적으로 거란에게 유리하다는 것이고, 일곱 번째는 지금 겉으로 거란에 굴종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실리(實利)는 크며 거란에 대항해 전쟁을 일으키면 국력을 소모하는 것이 막대하여 실리가 작다는 것이다.

거란장[契丹場]  거란 사람 포로들의 집단 수용지(收容地). 고려 고종(高宗) 6(1219)에 장군 김취려(金就礪) 등이 거란족의 강동성(江東城)을 함락시키고 항복한 군졸 5만여 명을 거두어 국내의 여러 곳에 나누어 살게 하였던 곳이다.

거란해[契丹奚 거란(契丹)은 본래 동호족(東胡族)인데 4세기 이래로 요하(遼河) 상류인 서랍목륜하(西拉木倫河 시라무렌, 潢水황수)와 노합하(老哈河 랴오허, 土河토하) 유역 일대에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 유목과 수렵을 생업으로 하며 거주하였다. 인접한 고구려(高句麗)를 자주 침략하다가 고구려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에게 정벌을 당해 일부는 고구려에 복속되고, 나머지는 흩어져 살다가 뒤에 당()나라에 복속되었다. 중국의 혼란기인 오대십국시대(五代十國時代)에 통일의 기운이 일어나면서, 916년에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가 여러 부족을 통합한 다음 거란을 건국하고 황제를 칭하였으며, 뒤에 국명을 요()로 바꿨다. ()4세기 무렵부터 동몽고(東蒙古)의 노합하(老哈河) 유역에서 유목생활을 하면서 서랍목륜하(西拉木倫河) 남쪽 연안 유역의 거란족(契丹族)과 이웃하고 있던 선비족(鮮卑族)의 한 부족이다. 처음에는 고막해(庫莫奚)라고 불렀으나, ()나라 이후로는 해()라고 칭하였다. 7세기 전반기부터 당()나라에 복속하였으며, 당나라에서는 해()의 추장들에게 도독(都督)이나 자사(刺史) 등의 관직을 주어서 그들을 예속시키는 기미정책(羈縻政策)을 실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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