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개車蓋, 거개노훈車蓋鑪薰, 거개정시안車蓋亭詩案


거개[車蓋]  비나 볕을 가리기 위()해 수레 위에 친 우산(雨傘) 같은 덮개. 상류 계급의 사람들이 타는 수레 위에 둥글게 버티던 우산 같은 휘장.

거개로훈[車蓋鑪薰]  계곡(谿谷) 장유(張維)의 증진일(贈眞一) 시에 남쪽 구름은 수레 위의 일산(日傘) 같고, 북쪽 구름은 모락모락 향불 연기같다.[南雲如車蓋 北雲如鑪薰]”라고 하였다. 단박에 깨달아 최고의 경지를 구현하려는 남종(南宗)의 초월적 성격과, 하나하나 단계를 밟아가 완성태를 이루려는 북종(北宗)의 점진적 속성을 절묘하게 비유하여 표현한 것이다.

거개정[車蓋亭]  호북성(湖北省) 안륙(安陸) 서북쪽 운수(溳水) 서쪽 기슭에 있다. 위문제(魏文帝)가 이곳에 들러 서북쪽 하늘에 구름이 떠 있는데, 구부정한 모습 마치 마차 차양 같구나.[西北有浮雲, 亭亭如車蓋.]”라고 한 이후 붙여진 이름이다. 이백(李白)이 이곳에서 벗들과 바둑을 두었다고 해서 태백정(太白亭)이라고도 한다.

거개정시안[車蓋亭詩案]  송사(宋史) 242와 권471에 의하면, () 나라 때 채확(蔡確)은 오처후(吳處厚)에게 시부(詩賦)를 배웠는데, 재상이 된 뒤 오처후의 승진 부탁을 거절하고 저지하기까지 하였다. 이후 채확이 안주(安州)로 폄출되어 거개정(車蓋亭)에서 노닐면서 시() 10()을 지었는데, 지한양군(知漢陽軍)으로 있던 오처후가 이 시는 선인황후(宣仁皇后)를 무방(誣謗)하는 뜻을 담고 있다고 공척(攻斥)하여 문언박(文彦博)이 채확을 영교(嶺嶠)로 내쫓으려 하였다. 이에 범순인(范純仁)과 여대방(呂大防) 등이 문자를 들추어내는 것은 성대한 세상의 일이 아니라고 말렸으나, 끝내 채확을 신주(新州)에 안치하였다. 이 일에 대해 주자(朱子)는 거개정 시로 죄안(罪案)을 삼은 것은 원우(元祐) 시대 현자(賢者)들이 도리어 바른 것을 버린 격이 되고 말았다고 하였다. <宋史 卷242, 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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