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우嘅雨, 개우석介于石, 개원改元, 개원갑자력開元甲子曆, 개원관開元觀

개우[嘅雨] 어지러운 세상을 뜻한다. 시경(詩經) 패풍(邶風) 북풍편(北風篇)북풍이 저리도 거세거니, 비와 눈이 펄펄 내리누나.[北風其喈 雨雪其霏]”라고 하였다.

개우석[介于石] 절의를 돌처럼 굳게 지키는 것을 이른다. 주역(周易) 계사전 하(繫辭傳下)군자는 기미를 보고 떠나면서 하루가 다하기를 기다리지 않는다. 예괘(豫卦) 육이(六二)돌처럼 견고해서 하루가 다하기를 기다리지 않으니, 정하고 길하다.’라고 하였다. 절개가 돌과 같으니 어찌 하루가 다하기를 기다리겠는가. 이를 통해서 군자가 결단하는 것을 알 수 있다.[君子見幾而作 不俟終日 易曰 介于石 不終日 貞吉 介如石焉 寧用終日 斷可知矣]”라는 말이 나온다.

개운[開運] 후진(後晉) 출제(出帝)의 연호(年號 944~947)이다.

개원[改元] 연호(年號)를 고치는 것으로 황제가 즉위하거나 특별한 일이 있을 적에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행하였는데, 대개 개원(改元)한 뒤에는 사면령 등의 은전을 내린다. 선왕(先王)이 죽은 직후에 임금이 즉위(卽位)하여도 당년에는 전의 연호(年號)를 그대로 쓰고 이듬해에야 연호를 고친다.

개원[改元] 후주(後主)가 선주(先主)를 계승하면 그 즉위한 해를 원년(元年)으로 삼고 선주(先主)의 기년(紀年)한 연호(年號)를 사용하지 않는데, 이를 개원(改元)이라고 한다. 연호는 한()나라에서 처음으로 사용하였는데, ()나라에 이르기까지 국가에 상서로운 일 또는 상서롭지 못한 일이 발생하였을 때 중세개원(中世改元: 중간에 와서 원년을 고침)하는 경우가 있었으나 명()나라 이후로는 일세일원(一世一元)의 원칙이 확립되었다.

개원[開元] ()나라 현종(玄宗)의 연호(年號: 713~741)이다. 개원(開元) 연간으로부터 대종(代宗)의 대력(大曆) 연간에 이르기까지를 성당(盛唐)이라 하여 당시(唐詩)가 전성(全盛)하던 시기로 일컫는데, 이때에 왕유(王維)와 맹호연(孟浩然), 이백(李白)과 두보(杜甫), 고적(高適)과 잠삼(岑參) 등의 문인이 배출되었다. ‘개원의 치(開元之治)’로 불릴 만큼 당조(唐朝)의 최성기(最盛期)였다. 전성(全盛)은 극성(極盛)과 같다.

개원[開原] 요동(遼東)의 개원부(開原府)이다.

개원갑자력[開元甲子曆] 남조(南朝) ()나라 조충지(祖沖之)가 만들어 510년부터 80년 동안 사용한 역법이다. 1년을 365.2428일로 정하여 송()나라 통천력(統天曆)이 나오기까지 가장 이상적인 수치였으며, 또 세차(歲差) 개념을 처음 적용하였다.

개원관[開元觀] 도관(道觀)의 이름이다. () 개원(開元) 연간에 창건되어 붙여진 이름이다. 당 고조(唐高祖) 이연(李淵)은 노자(老子: 이이李耳)와 동성(同姓)이라는 점을 들어 당()의 조선(祖先)이라 하며 적극 도교(道敎)를 보호하였다. 현종(玄宗) 때에는 전국의 모든 군에 조칙을 내려 개원관(開元觀)을 세우고 노자를 현원황제(玄元皇帝)라 하여 그 진용(眞容)을 그려서 개원관(開元觀)에 안치시켰으며 묘()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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