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자주자揩字注字, 개자추介子推, 개자치화介者拸畫
❍ 개자주자[揩字注字] 개자(揩字)는 글자를 지운 곳이고, 주자(注字)는 글자를 첨가한 곳이다.
❍ 개자추[介子推] 개자추(介子推)라는 사람이 15세에 형(荊: 楚)의 재상이 되자 공자(孔子)가 사람을 시켜 정치하는 모습을 관찰하도록 하였다. 심부름꾼이 돌아와 조정이 깨끗하고 일이 적었으며, 당 위에 스물다섯 늙은이가 있고, 당 아래에 스무 명의 준걸이 있었다[廊下有二十五俊士, 堂上有二十五老人.]고 대답하자, 공자가 ‘25인의 지혜(智慧)를 합하면 탕왕(湯王)과 무왕(武王)의 지혜보다 나을 것이고, 25인의 역량(力量)을 모으면 팽조(彭祖)의 역량보다 나을 것이다. 이렇게 천하를 다스리면 진실로 환난을 면할 것이다.[合二十五人之智, 智於湯武, 幷二十五人之力, 力於彭祖, 以治天下, 其固免矣乎.]’라고 하였다고 한다. <孔子家語 卷4 六本> <說苑 卷8 尊賢> 이십오로(二十五老).
❍ 개자추[介子推] 춘추 시대 진(晉)나라 사람이다. 자(子)는 어조사이고, 추(推)는 이름이다. 개지추(介之推)라고도 한다. 진 헌공(晉獻公)의 아들 문공(文公) 중이(重耳)가 공자(公子)의 신분으로 국난을 피해 19년 동안 국외로 떠돌 때, 그를 따라 온갖 고생을 다하며 허벅지살을 베어 봉양할 정도로 충성을 다하였다. 문공이 귀국하여 즉위한 뒤 문공을 수행했던 사람들 대부분이 녹(祿)을 받았으나 개자추를 잊고 빠뜨려, 그에게는 녹상(祿賞)이 없었으므로 어머니와 함께 면산(綿山)에 숨어 버렸다. 뒤늦게 문공이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는 면산을 둘러싼 땅을 모두 개자추의 봉지(封地)로 삼았다고 한다. 또 다른 기록에 의하면, 문공이 뒤늦게 개자추를 불렀으나 응하지 않으므로 그를 나오게 하려고 면산에 불을 질렀으나 개자추가 끝내 산에서 나오지 않고 나무를 끌어안은 채 불에 타 죽었는데, 문공이 이를 가련히 여겨 개자추가 죽은 날에 불을 피우지 못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이 일로 인하여 후인(後人)들이 그의 불우함을 불쌍히 여겨 그가 죽은 날을 한식(寒食) 명절로 정하여 화식(火食)을 금하며 그를 애도하고 있는바, 그가 죽은 날은 바로 동지(冬至)로부터 105, 6일 후로 거센 비바람이 몰아치는, 즉 지금의 음력 2월 25일경에 해당한다. 옛 풍속에 이날은 대맥죽(大麥粥), 행인죽(杏仁粥) 같은 것들을 미리 쑤어서 식혀 두었다가 먹었다고 한다. <春秋左氏傳 僖公24年> <史記 卷39 晉世家> <古今事文類聚前集 卷8 禁火周制>
❍ 개자치화[介者拸畫] 장자(莊子) 잡편(雜篇) 경상초(庚桑楚)에 “형벌로 다리를 잘린 사람이 화장도구를 버리는 것은 용모에 대한 사람들의 칭찬이나 헐뜯음을 도외시하기 때문이다.[介者拸畫 外非譽也]”라고 하였다. 개자(介者)는 형벌을 받아 다리를 잘린 사람이고[介者刖人也], 치화(拸畫)은 화장도구를 버린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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