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보開寶, 개보개옥改步改玉, 개보기품介甫碁品, 개보례開寶禮, 개보집介甫執

개보[開寶] 송 태조(宋太祖) 후기 968년부터 태종(太宗)이 즉위한 976년까지의 연호이다.

개보[開寶] 개원(開元)과 천보(天寶), 당나라 현종(玄宗)의 연호이다.

개보[介甫] ()나라 신종(神宗) 때의 재상 왕안석(王安石)으로, 개보(介甫)는 그의 자이다. 호는 반산(半山), 시호는 문정(文正), 형국공(荊國公)에 봉해졌다. 개혁 정치가이며 시인·문필가로 활약하였다. 신법(新法)이라는 개혁책을 통해 균수법(均輸法), 청묘법(靑苗法), 시역법(市易法), 모역법(募役法), 보갑법(保甲法), 보마법(保馬法) 등을 실시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개혁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당쟁이 격화되고 정치가 혼란에 빠지면서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개보개옥[改步改玉] 보폭(步幅)을 바꾸었으니 패옥(佩玉)도 바꾸어야 한다는 말로 임금의 일을 대행(代行)하는 자리에서 물러나 신하의 지위로 돌아왔으니 임금의 패옥(佩玉)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예기(禮記) 옥조(玉藻)임금이 시()와 함께 걸을 때에 임금은 접무(接武: 가 디딘 발자국의 반을 밟고 감)하고, 대부(大夫)는 계무(繼武: 가 디딘 발자국의 끝을 밟고 감)하고, ()는 중무(中武: 가 디딘 발자국에서 발 하나의 간격을 두고 따라감)한다.”고 하였으니, 각각 보폭(步幅)의 광협(廣狹)이 다르다. 보폭의 광협(廣狹)을 바꾸었으면 당연히 패옥(佩玉)의 등급도 바꾸어야 한다는 말이다.

개보기품[介甫碁品] 개보는 송() 나라 왕안석(王安石)의 자인데, 왕안석은 평소 남과 바둑을 둘 때 한 번도 깊이 생각해서 둔 적이 없었고, 자기가 지게 되면 매양 바둑판을 흩트려버렸다고 한다. 참고로, 왕안석(王安石)의 시 기()바둑 두기를 파하고 흑백을 거두니, 한자리 어느 곳에 승패 있을쏜가.[戰罷兩奩收黑白, 一枰何處有虧成.]”라고 하였다.

개보례[開寶禮] ()나라 개보통례(開寶通禮)를 가리킨다. 송 태조(宋太祖) 개보(開寶) 연간에 유온수(劉溫叟), 이방(李昉) 등이 만들었다.

개보저노성위지인순[介甫詆老成謂之因循] 개보(介甫)가 노성인이 주저하기를 잘한다고 비난함. 개보는 송 나라 때의 문장가인 왕안석(王安石)의 자()이다. 사마광(司馬光)이 왕안석에게 신법(新法)을 행하면서 소인배를 중용한 이유를 물었다. 이에 왕안석은 법을 시행할 때에 구시대 인물들은 앞으로 나아가기를 주저하므로 재주와 역량이 있는 신진을 등용하여 법을 시행하고, 그 뒤에 노성인을 등용하여 법을 지킬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사마광은 소인배들은 진출시키기는 쉬워도 물러나게 하기는 어려우니, 아마도 나중에 후회할 것이라고 충고하였다. <宋名臣言行錄 後集 卷7 司馬光>

개보집[介甫執] 개보(介甫)의 법 집행. 개보(介甫)는 북송(北宋) 시대 정치인 왕안석(王安石)의 자이다. 소식(蘇軾)이 일찍이 왕안석의 개혁 정치에 극력 반대한 것으로 인하여 왕안석의 증오를 크게 사서, 겨우 죽음만 면한 채 다년간 각지로 유배 생활을 전전했던바, 한번은 소식이 하옥되어 위급한 상황에 처했을 때, 왕안석의 아우인 왕안례(王安禮)의 구원에 힘입어 위기를 면하기도 했었다. <宋史 卷327 王安石列傳, 338 蘇軾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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