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지講紙, 강지덕姜至德, 강지욕신降志辱身, 강지재망구지종령綱之在網 裘之從領, 강진姜溍
❍ 강지[講紙] 과거의 강서(講書) 시험을 보일 때 쓰던 종이이다.
❍ 강지덕[姜至德] 강정일당(姜靜一堂). 조선 후기 여류시인이자 서예가. 성명은 강지덕(姜至德), 본관은 진주(晉州), 호는 정일당(靜一堂). 생몰연대(生歿年代)는 1772년(영조 48년)~1832년(순조 32년). 조선 초기의 문신인 강희맹(姜希孟)의 12세 손녀로 영조 48년인 1772년 충북 제천의 가난한 선비 집안에서 외동딸로 태어나 외조부와 부모에게 사서삼경을 배웠다. 어릴 때부터 시서(詩書)에 재주를 보여 주변사람들에게서 칭송을 받았다고 한다. 정일당은 20세 때 6살 연하의 파평윤씨(波平尹氏) 윤광연(尹光演)과 혼인하였다. 매우 빈한하였으나, 시모인 지일당(只一堂)과 시문(詩文) 화답을 할 만큼 학예의 경지가 높았다. 정일당은 유교경전 연구를 비롯해 30여 권의 저술을 남겼으나 모두 유실됐다. 사후 간행된 정일당유고(靜一堂遺稿)에 40여 편의 한시(漢詩)가 남아 있는데, 대부분 성인의 도와 학문 수련을 주제로 한 것으로 일반 여류문인과 달리 성리학에도 조예가 깊어 조선 규방문학의 수준을 높였다고 평가된다. 서예에도 능하여 해동호보(海東號譜)와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에 의하면, 초서와 예서를 잘하였으며, 황운조(黃雲祚)의 필법을 모사하여 은구철색(銀鉤鐵索)이 힘쓰지 않고도 자연히 문장을 이루었다고 하였다.
❍ 강지욕신[降志辱身] 논어(論語) 미자(微子)에 공자께서 여러 일민(逸民)들을 평하면서 유하혜(柳下惠)와 소련(小連)에 대해 “뜻을 낮추고 몸을 욕되이 하였으나 말은 윤리에 맞고 행실은 사려에 맞았다.[降志辱身矣 言中倫 行中慮]”라고 하였으며, 우중(虞仲)과 이일(夷逸)에 대해서 “은거하여 함부로 말하였으나 처신은 깨끗함에 맞고 벼슬하지 않음은 권도에 맞았다.[隱居放言 身中淸 廢中權]”라고 하였다.
❍ 강지재망 구지종령[綱之在網 裘之從領] 벼릿줄을 들어 올리면 그물이 매달려 올라오고, 갖옷의 옷깃을 들어 올리면 털이 옷깃을 중심으로 쏠리는 것처럼 큰 행적을 거론하면 작은 행적이 따라서 포함된다는 말이다. 서경(書經) 반경(盤庚)에 “그물이 벼릿줄에 달려 있어야 조리가 있어 문란하지 않은 것과 같다.[若網在綱, 有條而不紊.]”라고 하였고, 순자(荀子) 권학(勸學)에 “털옷의 옷깃을 들어 다섯 손가락을 굽혀 잡아당기면 온 갖옷의 털이 순하게 쏠린다.[若挈裘領, 詘五指而頓之, 順者不可勝數也.]”라고 하였다.
❍ 강진[姜溍]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진여(進汝), 호는 대산(對山). 1842년(헌종 8) 규장각검서관이 되었고, 이어서 1852년(철종 2)에 안협현감(安峽縣監)으로 나가 읍민을 잘 보살펴 조정으로부터 상을 받았다. 조선 후기에 이름 높은 서화가로서 중국에까지 명성을 떨친 증조부 강세황(姜世晃)의 서화기법을 본받아 산수화에 뛰어났으며, 동시에 시와 초서(草書)·예서(隷書) 등 글씨에도 뛰어나 사람들은 시(詩)·서(書)·화(畵)의 삼절(三絶)이라 칭송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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