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헌講軒, 강혁강시江革姜詩, 강현노인絳縣老人, 강현옹絳縣翁, 강현지년絳縣之年, 강현해絳縣亥

강헌[講軒]  강당(講堂). 고승들이 경전을 가르치고 법을 설하는 장소를 가리킨다.

강혁[江革]  강혁은 후한(後漢) 때 임치(臨淄) 사람으로 자는 차옹(次翁)인데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와 살았다. 천하가 어지러워져 도적이 여기저기 일어나자 어머니를 업고 피난하며 항시 나무를 하여 봉양하였다. 그러다가 도적을 만나면 그때마다 울며 노모를 봉양하게 해 달라고 애원하니 도둑들도 감동하여 차마 강혁을 어쩌지 못하고, 심지어는 다른 도적을 피하는 길을 가르쳐 주기도 하였다고 한다. <後漢書 卷69 江革列傳><晉書 卷88><南史 卷60>

강혁강시[江革姜詩]  강혁(江革)은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와 살았는데, 천하가 어지러워져 도적이 여기저기 일어나자 어머니를 업고 피난 다녔다. 그러다가 도적을 만나면 그때마다 울며 노모를 봉양하게 해 달라고 애원하여 감동하게 하니, 도적은 차마 강혁을 어쩌지 못하고 심지어는 다른 도적을 피하는 길을 가르쳐 주기도 하였다고 한다. 또 강시(姜詩)는 처와 함께 지극정성으로 어머니를 모셔 효성으로 이름이 났는데, 적미군(赤眉軍)이 강시의 마을을 지날 때 대효(大孝)를 놀라게 하면 귀신의 노여움을 살지도 모른다.”라고 하며 병기를 내려놓게 하였다고 한다. <後漢書 卷69 江革列傳, 114 列女傳 姜詩妻>

강현[江峴]  강변에 있는 고개. 또는 양양(襄陽)에 있는 현산(峴山)을 가리킨다. 맹호연(孟浩然)의 시 등녹문산(登鹿門山)동틀 때 흥이 올라 집을 나선 뒤, 작은 배로 현산을 두른 강을 건넜네. 모래톱이 가까워지며 물새들이 보이는데, 멀어지는 물가 나무 분별조차 할 수 없네.[淸曉因興來, 乘流越江峴. 沙禽近方識, 浦樹遙莫辨.]”라고 한 데서 보인다. 원화군현지(元和郡縣志) 양주(襄州)현산은 양양현 동남쪽 구 리 되는 곳에 동쪽으로 한수를 바라보고 있다.[峴山在縣東南九里, 東臨漢水.]”라고 하였다.

강현[絳縣 ()은 춘추 시대 진국(晉國)의 옛 수도인데, ()나라 때는 강현(絳縣)이라고 하였다.

강현노인[絳縣老人]  춘추 시대 진()나라 강현에 살았던 노인이다. 춘추좌전(春秋左傳) 양공(襄公) 30년에 “2월 계미일에 진()나라 도부인(悼夫人)이 기() 땅에 성을 쌓는 사람들에게 음식을 먹였는데, 강현의 노인이 나이가 많은데도 아들이 없어서 대신 부역에 나왔다가 함께 음식을 먹으러 갔다. 그의 나이가 의심스러워서 물었더니, 그가 말하기를 신은 하찮은 백성인지라 나이를 모릅니다. 신이 태어난 해는 정월 초하루가 갑자일이었습니다. 이제 445번째의 갑자인데, 마지막 갑자는 3분의 1이 지나갔습니다.’라고 하였다. 사광(師曠)이 계산하여 73세라고 하자, 조무(趙武)가 노인을 부역시킨 것이 자신의 잘못이라고 하면서, 부역을 면제하고 벼슬을 주었다.”라고 하였다. 1갑자는 60일이므로 444번의 갑자에 마지막 갑자 20일을 더하면 대략 26660일이 되며, 이것을 365로 나누면 대략 73세가 된다.

강현옹[絳縣翁]  강현(絳縣) 출신의 늙은이란 뜻이다. ()이 기성(杞城)을 쌓을 때 인부 중에 73세 된 강현(絳縣) 사람이 있었다. 이에 조맹(趙孟)이 자기 관할 구역 안의 주민인 것을 알고 불러서 사과하기를 내가 무능한데다 임금으로부터 큰일을 위임받고 진 나라에 걱정스러운 일이 많은 관계로 그대를 거두어 쓰지 못했다. 그리하여 그대를 오래도록 비참한 생활을 하게 했으니, 나의 죄이다. 감히 나의 무능을 사과드린다.”라고 하고, 그를 등용하였다. 당시 진 나라에 와 있던 노나라 사신이 돌아가 이 일을 보고하니, 계무자(季武子)가 말하기를 진은 아직 엿볼 수 없다.”고 하였다. <春秋左傳 襄公 30>

강현지년[絳縣之年]  ‘강현(絳縣) 노인의 나이73세를 가리킨다. 춘추 시대 진()나라의 도부인(悼夫人)이 기() 땅에서 성을 쌓는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해 잔치를 베풀었다. 이때 강현(絳縣)의 한 노인이 자식이 없어 성 쌓는 부역에 와서 일하다가 잔치에 참석했다. 그에게 나이를 물으니 일수(日數)445갑자(甲子)이다.”라고 하였다. 이는 26660일이 되므로 사광(師曠)73년이라 하고, 사구백(士久伯)26660일이라 판정했다. <春秋左氏傳 襄公 30>

강현해[絳縣亥]  좌전(左傳) 양공(襄公) 302월 계미(癸未)에 진 도공(晉悼公)의 부인이 여러 사람을 먹일 때에 강현노인(絳縣老人)이 그중 나이가 많았으나 자식이 없다 하니 의심하여 나이를 물었다. 그가 대답하기를 ()은 소인으로서 기년(紀年)을 모릅니다. 신이 나던 해는 정월 갑자삭(甲子朔)이었는데 4백에 45갑자가 더 있습니다. 그리고 계()는 지금 3분의 1밖에 되지 않습니다.”라고 하는데 무슨 말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이를 사광(師曠)에게 물으니, 사광이 각성자(卻成子)가 승광(承匡)에서 모이던 해였는데, 이해는 바로 73년이 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사조(史趙)는 또 ()는 이수육신(二首六身)이 있는데 하이여신(下二如身)이 그 일수(日數)입니다.[亥有二首六身 下二如身 足其日數]”라고 하였다. 사문백(士文伯)은 이 말을 듣고 그렇다면 266백에 육순(六旬)이 더 있다는 것이구나.”라고 하였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