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휴복江休復, 강흘糠覈, 강희康熙, 강희자전康熙字典, 강희제康熙帝
❍ 강휴복[江休復] 송대(宋代)의 시인으로 자(字)는 인기(隣幾)이고 개봉(開封) 진류(陳留) 사람이다. 과거에 급제하여 진사가 된 뒤에 계양감(桂陽監)으로 벼슬을 시작했다. 문장에 품위가 있고 시를 잘 지었으며 거문고와 바둑, 서법에서도 일가를 이루었다. 술을 좋아하고 명성이나 재물 등에 관심을 두지 않았으며 말을 타고도 책을 읽다가 길을 잃기 일쑤였다. 소순흠(蘇舜欽)과 교유했다. 저서로 춘추세론(春秋世論)과 가우잡지(嘉祐雜志), 당의감(唐宜鑒)이 있다.
❍ 강흘[糠覈] 강흘(糠核). 겨와 보리 싸라기. 조악한 음식. 무거리. 사기(史記) 권56 진승상세가(陳丞相世家) 승상(丞相) 진평(陳平)에 “승상(丞相) 진평(陳平)은 양무(陽武) 호유향(戶牖鄕) 사람이다. 젊었을 때 집은 가난하였으며 독서를 좋아했고 30무(畝)의 밭이 있었는데 단지 형인 진백(陳伯)과 함께 살았다. 진백은 늘 농사일을 하면서 진평에게 마음껏 돌아다니며 공부하게 했다. 진평은 위인이 키가 크고 생긴 것도 당당해서 사람들이 가난한 집에서 뭘 먹었길래 이렇게 통통하고 훤칠하냐고 물었다. 진평의 형수는 그런 진평에 대해 집안일을 돌보지 않는다고 질책하면서 ‘쌀겨나 먹일 수밖에 없다. 그런 시동생은 없느니만 못하다.’라고 하였다. 진백이 이 말을 듣고 자기 아내를 내쫓아 버렸다.[陳丞相平者, 陽武戶牖鄉人也. 少時家貧, 好讀書, 有田三十畝, 獨與兄伯居. 伯常耕田, 縱平使游學. 平為人長大美色. 人或謂陳平曰: 貧何食而肥若是? 其嫂嫉平之不視家生產, 曰: 亦食糠覈耳. 有叔如此, 不如無有. 伯聞之, 逐其婦而棄之.]”라고 한 데서 보인다. 또, 범성대(范成大)의 시 사시전원잡흥(四時田園雜興) 추일전원잡흥(秋日田園雜興)에 “세곡선 가득 차면 창고 문을 여는데, 알알이 고운 구슬 흰빛 서리 같구나. 눈물 머금고 두 종 떠서 일곡 바치고, 싸라기 남은 것으로 아이들을 먹이네.[租船滿載候開倉, 粒粒如珠白似霜. 不惜兩釧輸一斛, 尚贏糠覈飽兒郎.]”라고 한 데서 보인다.
❍ 강희[康熙] 청(淸) 나라 성조(聖祖)의 연호로 1662년부터 1722년까지 사용되었다.
❍ 강희자전[康熙字典] 청(淸)나라 때 강희제(康熙帝)의 칙명(勅命)으로 당시의 대학사(大學士) 진정경(陳廷敬)·장옥서(張玉書) 등 30명의 학자가 5년 만인 강희(康熙) 55년(1716년)에 편찬한 자서(字書)이다. 명(明)나라의 자휘(字彙) 정자통(正字通) 등의 구성을 참고하고 더욱 내용을 충실하게 하였으며, 12지(支)의 순서로 12집(集)으로 나누고 119부(部)로 세분하였다. 본문 이외에 총목(總目)·검자(檢字)·변사(辨似)·등운(等韻)·비고(備考)·보유(補遺)가 있다. 214의 부수(部首)를 세워 약 4만 7,000자를 각 부수에 배속시켜 획수 순으로 배열하고, 설문(說文)·옥편(玉篇)을 기본으로 하여 각자(各字)마다 반절(反切)에 의한 성음(聲音)·훈고(訓詁)·자해(字解)를 달아 속자(俗字)·통자(通字)를 상술하였다. 총자 수는 4만 9천 30자이고, 42권이다. 오늘날의 한자자전의 체재(體裁)는 여기에서 정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 강희제[康熙帝] 청(淸)나라 제4대 황제(재위, 1661~1722)로 성은 애신각라(愛新覺羅), 이름은 현엽(玄燁), 묘호는 성조(聖祖), 시호는 인황제(仁皇帝)다. 강희(康熙)는 연호다. 순치제(順治帝)의 셋째 아들로 8살 때 즉위하여 61년 동안 재위하였다. 대내적으로는 3번의 난을 평정하여 나라를 안정시켰고, 대외적으로는 중국의 영토를 크게 확장하였다. 청나라의 전성기를 연 황제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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