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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총[江總]  江總(강총)江摠(강총)이라고도 한다. 남조(南朝) ()나라 제양(齊陽) 고성(考城: 현재의 하남河南 상구商丘 민권현民權縣) 사람이다. 자는 총지(總持)이고, 강부(江紑)의 아들이다. 그의 6대조 강이(江夷)는 남조 송(南朝宋) 때 재상이었고, 강총 또한 시문(詩文)으로 당세에 이름이 높았고 벼슬도 재상에 이르렀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문재(文才)가 있어 18세에 양무릉왕부(梁武陵王府)의 법조참군(法曹參軍)이 되었다. 학문에 열중해 문채가 있었고, 양 무제(梁武帝)에게 시문(詩文)을 인정받아 벼슬이 태상경(太常卿)에 이르렀다. 후경(侯景)의 난이 일어났을 때 영남(嶺南)을 떠돌았다. 후경(侯景)의 난 이후에 회계(會稽)로 피난갔다가 천가(天嘉) 4년 진 문제(陳文帝)의 부름을 받고 중서시랑(中書侍郞)으로 조정에 복귀했고, 진 후주(陳後主) 즉위 후 상서령(尙書令)이 되었다. 그러나 정무는 돌보지 않고 후주와 함께 후원에서 연회에만 골몰하면서 염정시를 써내 압객(狎客)으로 불렸다. ()나라가 망하자 수()나라로 들어가 상개부(上開府)에 올랐다가 강도(江都)에서 죽었다. 세칭 강령(江令)으로 불렸다. 문집 30권이 있었지만 산실되었고, 명나라 때 만들어진 강령군집(江令君集)을 통해 100여 편의 시가 전한다. 작품에 우장안귀환양주(于長安歸還揚州)와 규원편(閨怨篇) 등이 있다.

강총[江摠 江摠(강총)江總(강총)이라고도 한다. 남조(南朝) ()나라 문인(文人) 강엄(江淹)으로 자는 총지(摠持)이다. 동무령(東武令)을 지냈으므로 강령(江令)이라고도 한다. 벼슬은 상서령(尙書令)에 이르렀다. 오칠언시(五七言詩)에 뛰어나서 명성이 높았다. 난리를 만나 외숙이 있는 영남(嶺南)에 가서 의탁하며 오래도록 고향에 돌아가지 못함을 슬퍼하는 시를 많이 읊었다. () 나라가 망하자 진() 나라에서 벼슬 살고 또 수() 나라에서 벼슬하니 삼조(三朝)를 섬겼다. 그는 양무제(梁武帝) 태청(太淸) 3년에 나이 31세로 후경(侯景)의 난리를 피해 유랑하기 시작하여 그로부터 14년이 지난 진문제(陳文帝) 천가(天嘉) 4년 나이 45세가 되어서야 조정에 돌아왔는데 그때까지도 머리가 검었다는 고사가 전한다. 두보(杜甫)의 만행구호(晩行口號) 시에 멀리 양나라 강총에게 부끄러워라, 집에 돌아와서도 머리 아직 안 세었었지.[遠媿梁江摠 還家尙黑頭]”라고 하였다.

강총미환가[江摠未還家]  江摠(강총)江總(강총)이라고도 한다. 강총은 남조(南朝) () 때의 시인으로 벼슬은 상서령(尙書令)에 이르렀다. 32세 때에 난리를 만나 고향을 떠나, 그의 외숙이 있는 영남(嶺南)으로 가서 의탁하였는데, 그로부터 14, 15년 동안을 외국에 떠돌아다니다가 45세가 되어서야 돌아왔다. 오랫동안 돌아오지 못하면서 고향을 그리워하는 시를 지었다. 전녹생(田祿生)의 시 영호루차운(暎湖樓次韻)왕찬은 부를 지어 내 땅 아니라 했거니와, 강총은 돌아가길 생각했으나 정작 집에 못 갔네.[仲宣作賦非吾土 江令思歸未到家]”라고 하였다.

강총외가추정[江摠外家趨庭]  강총(江摠)은 남조(南朝)시대 양()나라의 문인으로 일곱 살에 고아가 되어 외가에서 자랐는데, 총명하고 민첩하였다. 그의 외숙(外叔)인 오평후(吳平侯) 소려(蕭勵)가 특별히 그를 사랑하며 이르기를 너의 정신과 풍채가 영특하니 뒤에 마땅히 나보다 더 유명해질 것이다.”라고 하면서 그를 격려하며 보살폈던 고사가 전한다. <陳書 卷27 江摠列傳> 추정(趨庭)은 어버이의 가르침을 받는 것을 뜻한다. 공자가 홀로 서 있을 때에 아들 백어(伯魚)가 종종걸음으로 뜰을 지나가자[趨而過庭], 공자가 그를 불러 세우고서 시()와 예()를 배워야 한다고 가르침을 내렸던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論語 季氏> 참고로 두보(杜甫)의 시 입형주(入衡州)강총처럼 외가에서 길러지고, 사안처럼 항상 흥에 겨웠다오.[江總外家養 謝安乘興長]”라고 하였다. <杜少陵詩集 卷23>

강총흑두[江摠黑頭]  강총(江摠)은 양()나라 때의 문인(文人)으로 특히 오칠언시(五七言詩)에 뛰어나서 명성이 높았다. 그는 양 무제(梁武帝) 태청(太淸) 3년에 나이 31세로 후경(侯景)의 난리를 피해 유랑하기 시작하여 그로부터 14년이 지난 진 문제(陳文帝) 천가(天嘉) 4년에 나이 45세가 되어서야 조정에 돌아왔는데, 그때까지도 머리가 아직 안 세었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두보(杜甫)의 시 만행구호(晩行口號)멀리 양 나라 강총이, 집에 돌아왔는데도 오히려 머리가 검었음을 부끄러워하듯 하노라.[遠愧梁江摠 還家尙黑頭]”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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