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결질박介潔質樸, 개경蓋傾, 개경開徑, 개경사開慶寺, 개계芥雞, 개계開繼
❍ 개결질박[介潔質樸] 성품이 꼿꼿하고 깨끗하며 질박함을 이른다. 신당서(新唐書) 원덕수전(元德秀傳)에 “원덕수(元德秀)는 성품이 꼿꼿하고 깨끗하고 질박하니, 사대부들이 모두 그의 높은 행실에 탄복하였다.[德秀性介潔質樸, 士大夫皆服其高.]”라고 한 데서 보인다.
❍ 개경[蓋傾] 경개(傾蓋). 수레를 멈추고 일산을 기울인다는 뜻으로, 길에서 잠깐 만나는 것을 뜻한다. 사기(史記) 권83 추양열전(鄒陽列傳)에 “속어에 ‘백발이 되도록 오래 사귀어도 처음 사귄 듯하고, 수레를 멈추고 잠깐 만났어도 오래 사귄 듯하다.’라고 하였으니, 그 까닭은 무엇인가. 서로를 아느냐 모르느냐에 달려 있다.[諺曰, 白頭如新, 傾蓋如故, 何則, 知與不知也.]”라고 하였다.
❍ 개경[開徑] 길을 내다. 동한(東漢)의 조기(趙歧)가 쓴 삼보결록(三輔決錄)에 “장후는 자가 원경인데 집 정원에 샛길 세 개를 만들어두고 오직 양중과 구중 두 사람만을 불러 어울렸는데, 그 둘은 모두 고상하고 청렴하며 명리를 멀리하는 선비였다.[蔣詡, 字元卿, 舍中三徑, 唯羊仲, 裘仲從之遊, 二仲皆雅廉逃名之士.]”라고 하였다. 장후는 왕망(王莽)이 전권을 휘두를 때 연주자사(兗州刺史)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내려가 은거하였다. 이후 개경(開徑, 開逕)이란 말은 소수의 고상한 인물만을 접대하고 관리들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참고로, 고금사문유취(古今事文類聚) 전집(前集) 권4에 “당(唐)나라의 부호(富豪) 왕원보(王元寶)가 큰 눈이 올 때마다 자신의 거처에서부터 동네 어귀까지 눈을 쓸어 길을 내고 빈객을 맞이하여 술자리를 열었다[巨豪王元寶, 毎大雪, 則自所居至坊巷口, 掃雪開徑, 迎揖賓客, 飲宴.]”는 고사가 있다.
❍ 개경[開徑] 오솔길을 열다. 오솔길을 치우다. 전한 말엽에 왕망(王莽)이 황권을 찬탈하자 연주자사(兗州刺史)였던 장후(蔣詡)는 병을 핑계로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인 두릉(杜陵)에 은거하면서 바깥출입을 하지 않았다. 그는 집에 있는 대나무 숲에는 세 개의 샛길이 있었는데 평소에는 문을 닫아두고 손님 맞기를 사양하다가 오랜 친구인 구중(求仲)과 양중(羊仲) 두 사람이 찾아올 때만 이 길을 통해 안으로 들게 했다. 두 사람은 모두 입신양명을 멀리한 고사(高士)였다. 이후로 삼경(三徑, 三逕)은 조정에 출사하지 않고 은거한 사람들을 뜻하게 되었다. 또, 도잠(陶潛)의 귀전원(歸田園)에 “내 본심이 정히 이와 같으니, 오솔길 내고 좋은 친구만 바라노라.[素心正如此, 開逕望三益.]”라고 하였다. 장사삼경(蔣舍三徑). 도잠삼경(陶潛三徑).
❍ 개경사[開慶寺] 경기도 양주군 검암산 남쪽에 있던 절로서, 건원릉의 재궁(齋宮)이다. 태종(太宗) 8년(1408)에 개경사로 명명하고 조계종에 예속시켰으며, 태종 10년에 경주 백률사 전단관음상(栴檀觀音像)을 이 곳으로 옮겼다.
❍ 개계[芥雞] 개계(芥雞)는 개계(介雞)와 같은 말로, 닭에 갑옷을 입혀서 싸우게 하는 것, 혹은 겨자를 뿌려서 상대의 닭이 눈을 뜨지 못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춘추 시대 노(魯)나라 계씨(季氏)와 후씨(郈氏)의 닭이 서로 싸울 적에, 계씨가 자기 닭에 갑옷을 입혀서 상대의 닭이 찍지 못하게 하니, 후씨가 닭의 발톱에 쇠붙이를 끼워 공격하였다[季郈之雞鬭 季氏介其雞 郈氏爲之金距]는 말이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소공(昭公) 25년 조에 나온다. 또 계씨가 자기 닭의 깃털에 겨자를 뿌렸다[季氏芥雞羽]는 말이 사기(史記) 권33 노주공세가(魯周公世家)에 나온다.
❍ 개계[開繼] 개계(開繼)는 계왕성개래학(繼往聖開來學)을 이르는 말로, 과거 성인의 학문을 계승하고 미래의 학자들에게 열어서 보여 주는 일을 말한다. 주희는 중용장구(中庸章句) 서문에서 공자의 덕을 찬양하면서 “옛 성인을 잇고 후대의 학자를 열어 준 것은 그 공이 도리어 요순보다도 낫다.[繼往聖開來學, 其功反有賢於堯舜者.]”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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