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관요蓋寬饒, 개관출정開關出征, 개광開壙, 개괘開卦

개관요[蓋寬饒] 갑관요(蓋寬饒). 합관요(蓋寬饒). ()나라 선제(宣帝) 때 사람이다. 전한(前漢) 선제(宣帝) 때의 명신으로 자는 차공(次公)이며 위군(魏郡) 출신이다. 품성이 강직 공청(剛直公淸)하여 직언을 잘했으므로, 황제가 형법(刑法)을 밝힐 생각에서 그를 중서관(中書官)에 임명하였다. 공경(公卿)과 귀척(貴戚)들의 죄상을 몰래 조사하여 검거하자 모두 두려워하여 감히 법을 범하지 못했다고 한다. 간대부(諫大夫)를 거쳐 사예교위(司隸校尉) 등을 지내다가 천하를 자기 집으로 삼지 말라.”는 상주(上奏)를 하여 대역부도(大逆不道)로 하옥되자 차고 있던 칼을 꺼내어 자결하였다. 그가 일찍이 평은후(平恩侯) 허백(許伯)에게 나에게 술을 많이 권하지 마시오. 나는 술에 미쳤으니 그대는 경계하시오.”라고 하였다. ‘자가 지명(地名)이나 성씨(姓氏)로 쓰일 때에는 음이 이다.

개관요[蓋寬饒] 갑관요는 전한 선제(前漢宣帝) 때의 명신으로 자는 차공(次公)이며 위군(魏郡) 사람이다. 성품이 강직하고 기개가 높아 주변 사람들과 자주 마찰을 일으켰다. 개관요(蓋寬饒)가 허씨(許氏)와 사씨(史氏)의 노여움을 사서 죄를 얻자, 정창(鄭昌)이 구제하면서 말하기를 위로 허(()에게 붙은 적이 없고, 아래로 김(()에게 청탁한 적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는데, 이 말이 더욱 선제(宣帝)의 노여움을 격발시켰다. 정창(鄭昌)은 전한 선제 때의 인물로 자는 차경(次卿)이다. (()는 선제(宣帝)의 외척인 허백(許伯)과 사고(史高)를 가리키고, (()은 공신세족인 김일제(金日磾)와 장안세(張安世)를 가리킨다. 정창이 구제하려한 노력은 효과를 보지 못하고 개관요는 스스로 자결하였다. <前漢書 卷77 蓋寛饒傳>

개관요[蓋寬饒] 갑관요는 한() 나라 사람으로 자()는 차공(次公)인데 효렴(孝廉)으로 뽑혀 강직하기로 유명하였다. 당시의 귀족인 허백(許伯)의 새 집 낙성식에 가서 술자리가 무르익었을 때, 장신소부(長信少府) 단장경(檀長卿)이 일어나 원숭이와 개가 싸우는 춤을 추자 좌중이 모두 웃었으나, 갑관요만은 위를 쳐다보며 아름답구나! 그러나 부귀는 무상한 것이어서 갑자기 주인이 바뀌어 버리니, 집은 여관이나 같은 것이다. 이런 경우를 내가 많이 보았다. 오직 삼가고 또 삼가야만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는데, 어찌하여 이를 경계할 줄 모른단 말인가.[美哉! 然富貴無常, 忽則易人, 此如傳舍, 所閱多矣. 唯謹慎為得久, 君侯可不戒哉.]”라고 탄식하였다. 옆의 사람이 민망하여 차공(次孔)은 술만 취하면 미친다.”라 하니, 주인이 차공은 깨어있으면서도 미쳤구먼.[醒狂]”이라 하였다. <漢書 卷77 蓋寛饒傳> <古今事文類聚 續集 卷6 居處部 館驛 第如傳舍, 15 燕飮部 酣飮 次公酒狂>

개관요[蓋寬饒] ()나라 때 강직하고 청렴하기로 이름이 높았던 사람으로, 자가 차공(次公)이다. 공경(公卿)과 귀척(貴戚)들의 죄상을 몰래 조사하여 검거하자 모두 두려워하여 감히 법을 어기지 못했다고 한다. 간의대부(諫議大夫)가 관요(寬饒)를 칭송하며 신이 들으니, 산에 맹수가 있으면 여곽(藜藿)을 캐지 못하고 나라에 충신이 있으면 간사한 사람이 일어나지 못하다고 합니다.[山有猛獸 藜藿爲之不采 國有忠臣 奸邪爲之不起]”라고 하였다.<漢書 卷77 蓋寬饒傳>

개관출정[開關出征] ()은 함곡관(函谷關)을 이른다. 함곡관(函谷關)은 황하(黃河) 남안의 영보(靈寶) 남쪽 10리 지점에 있는데, 동쪽 중원(中原)으로부터 서쪽 관중(關中: 지금의 서안西安)으로 들어가는 관문이다. 이곳은 동서 20여 리에 걸친 황토층의 깊은 골짜기로 양안(兩岸)이 깎아지른 듯 솟아 있어 그 모양이 마치 함()처럼 생겼다고 하여 이러한 이름이 붙여졌는바, ()나라 당시 이곳은 진()나라를 보호하는 천혜의 요새였기 때문에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으로 불렸다. ()나라는 함곡관(函谷關)을 나와 여러 제후국들을 침략하였는데, 침략당한 나라들은 대부분 영토를 할양하고 강화를 맺었다.

개광[開壙] 관을 넣을 묏구덩이를 파는 일. 송장을 묻을 구덩이를 팜.

개괘[開卦] 점을 칠 때 근거가 되는 괘상을 보고 길흉을 판단하는 것을 가리킨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