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소칠재자江蘇七才子, 강송현가불쇠講誦絃歌不衰, 강쇄韁鎖, 강수講蒐, 강수强首

강소칠재자[江蘇七才子] 강남칠자(江南七子). 건륭제 때 시문으로 이름이 높았던 왕창(王昶), 왕명성(王鳴盛), 오태래(吳泰來), 전대흔(錢大昕), 조문철(趙文哲), 조인호(曹仁虎), 황문련(黃文蓮)을 꼽는다.

강송현가불쇠[講誦絃歌不衰] 공자(孔子)가 채()나라에서 3년 동안 거주하고 초()나라의 초빙을 받아 가던 중, ()나라 대부와 채나라 대부가 보낸 수하인들에게 포위된 일이 있었다. 당시에 “7일 동안 식량이 떨어지고 외부와 두절된 상태에서 채소국도 배불리 먹지 못해, 따르는 이들이 모두 병들었는데, 공자는 더욱 강개하여 강송하며 현가를 그치지 않았다.[絶糧七日, 外無所通, 藜羮不充, 従者皆病, 孔子愈慷慨, 講誦絃歌不衰.]”라는 고사가 전한다. <孔子家語 卷5 在厄第20>

강쇄[韁鎖] 고삐와 쇠사슬. ()하여 구속이나 속박을 의미한다.

강쇄[韁鎖] 명강이쇄(名韁利鎖)의 준말로 명리(名利)의 굴레를 쓰고 이록(利祿)의 쇠사슬에 묶인 것을 뜻하는 말이다.

강수[降水]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 신도국(信都國) 신도현(信都縣) 조에 우공(禹貢)에는 강수(絳水)도 바다로 들어간다고 하였다.[禹貢絳水亦入海]”라고 주석되어 있다.

강수[講蒐] 군사 훈련을 위한 사냥을 말한다.

강수[强首] 신라(新羅) 때의 유학자이며 문장가로서, 특히 태종 무열왕 때에는 당() 나라와 신라 사이에 왕래하던 국서(國書)를 도맡아 크게 공헌하였고, 신문왕 때에는 처음으로 국학(國學)을 세워 여러 박사(博士)를 두었는데, 이 때 강수가 설총(薛聰)과 함께 경서(經書)를 가지고 제자들을 가르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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