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江聲, 강성康成, 강성薑性, 강성江城, 강성姜姓
❍ 강성[江聲] 청(淸) 건륭(乾隆) 연간의 경학가(經學家)이자 서법가(書法家)로, 강소(江蘇) 원화(元和: 지금의 소주蘇州) 상숙현(常熟縣)사람이다. 자(字)는 경도(䲔濤)·숙운(叔澐), 호(號)는 간정(艮庭)이다. 상서(尙書)에 정통하였다. 소학(小學)과 설문해자(說文解字)를 정밀히 연구하였다. 묵죽(墨竹)을 잘 그렸고, 책을 좋아하여 비본(秘本)의 교감(校勘)이 정확하다는 칭송을 받았다. 주요 저서에 전서(篆書)로 저술한 육서설(六書說), 경학서(經學書)인 논어질(論語質) 및 상서집주음소(尙書集注音疏), 포엽재고(匏葉齋稿)가 있다.
❍ 강성[康成] 강성(康成)은 후한(後漢: 동한東漢) 때의 경학자(經學者)로 예기(禮記) 등의 주석을 낸 정현(鄭玄)의 자(字)이다. 북해(北海) 고밀인(高密人)이다. 훈고학(訓詁學)·경학(經學)의 시조로 경학의 금문(今文)과 고문(古文) 외에 천문(天文)·역수(曆數)에 이르기까지 광범한 지식의 소유자였다. 마융(馬融)에게 수학하고 산동(山東)으로 돌아가자, 마융이 ‘도(道)가 동으로 갔다’는 말을 했을 정도로 뛰어났다. 마융(馬融)을 사사하고 유학한 지 10여 년에 동래(東萊)로 돌아와 농사를 지었는데 당고(黨錮)의 화가 일어나서 14년 동안 피금(被禁)되자 은거하며 경업(經業)을 닦아 많은 경서에 주를 달았다. 정현은 농사를 짓고 살면서 학문에만 전념하여 문도(門徒)가 수천 명에 이르렀는데, 국상(國相) 공융(孔融)이 정현을 매우 존경하여 그가 사는 향리를 특별히 정공향(鄭公鄕)이라 명명하기까지 하였다. 정현은 경전(經傳)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일대를 풍미했으며, 삼경(三經)을 비롯하여 많은 경전의 주서(註書)를 남기고, 그 밖에도 천문(天文)·예설(禮說) 등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모시(毛詩), 삼례(三禮), 주역(周易), 상서(尙書) 등에 주석을 낸 양이 100만 어(語)나 될 정도로 저술에 힘썼고, 금문(今文)과 고문(古文)의 학술을 통합한 ‘한학의 집대성’이라 불린다. 정현이 병으로 관직을 그만두고 집에 돌아와 지내는데 하루는 꿈에 공자가 나타나 “일어나라. 일어나라. 올해는 진년(辰年)이고 내년은 사년(巳年)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정현이 참술(讖術)로 맞추어보고 자신의 목숨이 다할 줄 알았는데, 과연 그해 6월에 병으로 죽었다 한다. <後漢書 卷65 鄭玄列傳>
❍ 강성[薑性] 강성은 강계지성(薑桂之性)의 준말로, 흔히 사람의 성품이 생강과 육계의 매운 맛처럼 강직한 경우를 비유한 말로 쓰인다.
❍ 강성[江城] 강에 임하여 세워진 성. 강가에 있는 도시.
❍ 강성[江城] 강하(江夏: 현재의 무한武漢)을 가리킨다. 장강(長江)과 한수(漢水)에 연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 강성[姜姓] 성(姓)이 강(姜)이었던 제(齊)나라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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