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빈江彬, 강빈姜嬪, 강빈降嬪, 강빙각안江冰閣岸

강빈[江彬] 명나라 때의 선부(宣府) 사람으로 자는 문의(文宜)이다. 성품이 교활한 데다 말을 잘 타고 활을 잘 쏘았으므로 무종(武宗)에게 총애를 받아 도지휘첨사(都指揮僉事)가 되어 군사통수권을 쥐는 등 권세가 막강하고 횡포가 심하였다. <明史 卷307>

강빈[姜嬪] 인조(仁祖)의 맏아들 소현세자(昭顯世子)의 빈(). 세자가 인조의 미움을 받다 죽은 뒤 소의(昭儀) 조씨(趙氏)와 반목이 생겨, 조씨가, 강빈이 세자를 죽였고 왕실을 저주한다고 무고하였다. 이듬해에 어선(御膳)에 독약을 넣은 사건이 발생하자 또 강빈이 무고를 받고 그 장본인으로 지목되어, 결국에는 후원(後苑)의 별당에 유폐(幽廢)되었다가 사사(賜死)되고, 어린 아들은 귀양 갔다.

강빈[姜嬪] 소현세자(昭顯世子)의 빈()인 민회빈(愍懷嬪) 강씨(姜氏)를 말한다. 1637(인조15)에 세자와 함께 심양(瀋陽)에 볼모로 잡혀갔다가 1644년에 귀국했는데, 그 이듬해에 세자가 인조의 미움을 받다가 죽은 다음 곧이어 소용(昭容) 조씨(趙氏)의 무고로 조씨에 대한 저주 사건의 배후자로 지목되었다. 1646(인조24) 1월에 인조가 수라상에 올라온 전복 구이에 독이 있다면서 그 배후로 강빈을 지목하였다. 이에 강빈 처소의 궁인들을 내옥(內獄)에서 심문하도록 하는 한편, 강빈을 후원 별당에 유폐시켰다가 212일 사사(賜死)하라는 명을 내렸다. 대사헌 홍무적(洪茂績), 지평 조한영(曺漢英) 등 대각에서 상소를 올려, 강빈을 사사하는 대신 위호를 삭탈하여 여염으로 폐출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인조는 이러한 관료들의 주장에 대해 강빈이 재물로 그들을 꾀여 당파를 이룬 것이라면서, 강빈 사사에 반대하는 옥당의 관원들을 체직시키는 강경책 등을 써서 315일 강빈을 궁에서 폐출하여 사가(私家)에서 사사하고, 교명죽책(敎命竹冊(장복(章服) 등을 거두어 불태우도록 하였다. <仁祖實錄>

강빈[降嬪] () 임금의 두 딸인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이 순() 임금의 왕비가 된 것을 말한다. 서경(書經) 요전(堯典)요 임금이 두 딸을 규수(嬀水) 북쪽에 시집보내 우순(虞舜)의 아내가 되게 하였다.[釐降二女于嬀汭 嬪于虞]”라는 말을 줄인 것이다.

강빙각안[江冰閣岸] 송자대전수차(宋子大全隨箚)에 의하면, 강 얼음[江冰]을 언덕 위로 올려놓는다는 뜻으로 해석하였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