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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방[姜龐] 고대 중국의 이십사효(二十四孝) 중 한 사람이다.

강백[江伯] 하백(河伯), 즉 강물 귀신을 가리킨다.

강백[康伯] ()나라 사람으로, 한백(韓伯)은 그의 자()이다. 한강백은 청아(淸雅)한 성품에 문예(文藝)가 뛰어나 집이 가난한데도 명사(名士)의 풍류가 있었다고 한다. <晉書 卷75 韓伯列傳>

강백[康伯] 후한(後漢) 때 대표적인 은자(隱者)의 한 사람인 한강(韓康)을 가리킨다. 그의 자가 백휴(伯休)이므로 이렇게 부르는 것이다. 그는 30여 년 동안 명산의 약초를 캐다가 장안(長安) 시장에서 늘 똑같은 값으로 팔면서 흥정을 하지 않았다. 어느 날 어떤 여자가 그와 흥정을 하다가 화를 내며 당신이 뭐 한백휴라도 되기에 값을 깎아 주지 않는가.[公是韓伯休那 乃不二價乎]”라고 하자, 한강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내 원래 이름을 숨기고자 하였는데, 지금 보잘것없는 여자까지도 나를 알아보니 약 따위를 팔아서 무엇하리.”라고 탄식하고는 패릉(霸陵)의 산속으로 숨어 버렸다 한다. <後漢書 卷113 逸民列傳 韓康>

강백년[姜柏年] 1603~1681.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숙구(叔久), 호는 설봉(雪峯한계(閑溪청월헌(聽月軒),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1627(인조5) 정시 문과에 을과로 합격한 뒤, 좌승지·이조 참판 등을 역임하였고, 청백리로 이름이 높았으며, 1690(숙종16)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뒤에 청백리로 녹선(錄選)되었다. 온양의 정퇴서원(靜退書院), 수안의 용계서원(龍溪書院), 청주의 기암서원(機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한계만록(閒溪漫錄)과 설봉집(雪峰集)이 있다.

강백석[姜白石] 송 나라 때 고증학자로 일찍이 강첩평(絳帖平)을 저술한 강기(姜夔)를 이른다. 백석은 그의 호이다. 자는 요장(堯章)인데 송() 파양인(鄱陽人)으로 무강(武康)에 우거(寓居)하여 백석동천(白石洞天)과 더불어 이웃을 하였으므로 호를 백석도인(白石道人)이라 하였다. 그 시는 풍격이 고수(高秀)하며 사()는 더욱 정심화묘(精深華妙)하여 음절문채(音節文采)가 다 한때에 으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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