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동업하江東鄴下, 강동위북江東渭北, 강동일모운江東日暮雲, 강동주江東舟, 강동지전江東之戰

강동업하[江東鄴下] 안씨가훈(顔氏家訓) 치가(治家)강동 지방의 부녀자들은 조금도 교유함이 없어, 심지어 혼인을 맺은 사돈 집안끼리도 혹은 십수 년 동안 얼굴을 모르고 지내기도 한다. 오직 안부를 전하거나 인사 물품을 보내 주는 것으로 은근한 정을 표할 뿐이다.[江東婦女 略無交遊 其婚姻之家 或十數年間 未相識者 唯以信命贈遺 致慇懃焉]”라고 하였고, 업하 지방의 풍속은 오직 부인이 가문을 유지한다. 송사를 하여 시비를 가리기도 하고, 손님을 초청하거나 맞이하기도 하며, 아들을 대신해 관직을 구하러 다니기도 하고, 남편을 위해 관청에 억울함을 호소하기도 한다. 이것은 바로 항()과 대() 지방의 유풍이다.[鄴下風俗 專以婦持門戶 爭訟曲直 造請逢迎 代子求官 爲夫訴屈 此乃恒代遺風乎]”라고 하였다.

강동위북[江東渭北] 친한 친구끼리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 만나지 못함을 뜻한다. 두보(杜甫)가 위북(渭北)에 있을 때 강동(江東)에 있는 이백(李白)을 그리며 지은 춘일억이백(春日憶李白)시에 위수 북쪽엔 봄 하늘의 나무요, 강 동쪽엔 해 저문 구름이로다. 어느 때나 한 동이 술을 두고서, 우리 함께 글을 자세히 논해 볼까.[渭北春天樹, 江東日暮雲. 何時一樽酒, 重與細論文?]”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강동일모운[江東日暮雲] 두보(杜甫)의 춘일억이백(春日憶李白) 시에 위수 북쪽엔 봄 하늘의 나무요, 강 동쪽엔 해 저문 구름이로다. 어느 때나 한 동이 술을 두고서, 우리 함께 글을 조용히 논해볼꼬.[渭北春天樹 江東日暮雲 何時一樽酒 重與細論文]”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전하여 친구 간에 서로 헤어져 있으면서 그리워하는 것을 뜻한다.

강동주[江東舟] 최후의 도피처. 비참한 최후. ()나라의 항우(項羽)가 한군(漢軍)과 싸우면서 해하(垓下)에 진()을 치고 있을 때, 한군 및 제후군(諸侯軍)의 겹겹 포위 속에서 밤중에 사방에서 초가(楚歌)가 울려 퍼지는 소리를 듣고는 크게 놀라서 말하기를 한나라가 이미 초나라를 차지했단 말이냐.”라 하고, 스스로 시를 지어 슬피 노래하기를 힘은 산을 뽑을 만하고 기개는 세상을 덮었건만, 시운이 이롭지 못함이여 오추마가 가지 않는구나. 오추마가 가지 않음은 어쩔 수 없거니와, 우미인아! 우미인아! 너를 어찌한단 말이냐.[力拔山兮氣蓋世 時不利兮騅不逝 騅不逝兮可奈何 虞兮虞兮奈若何]”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800()를 이끌고 포위망을 탈출하였다. 항우가 동쪽으로 가서 오강(烏江)을 건너려고 하였는데, 오강의 정장(亭長)이 배를 대놓고 기다리고 있다가 말하기를 강동(江東) 지역이 비록 작지만 땅이 사방 천 리이고 백성도 수십만 명이나 되니, 또한 충분히 왕 노릇을 할 수가 있습니다. 지금 저만이 배를 가지고 있으니, 원컨대 대왕께서는 서둘러 건너소서.”라 하니, 항우가 웃으며 말하기를 내가 강동 지역의 자제 8천 명과 함께 강을 건너 서쪽으로 갔었는데, 지금 한 사람도 돌아오지 못했으니, 설령 강동의 부형들이 나를 불쌍히 여겨 왕으로 삼더라도 내 마음에 유독 부끄러운 생각이 들지 않겠는가.[籍與江東子弟八千人 渡江而西 今無一人還 縱江東父兄 憐而王我 我獨不愧於心乎]”라 하고는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史記 卷7 項羽本紀>

강동지전[江東之戰] 강동(江東)의 싸움. 강동의 싸움은 중국의 금() 나라가 쇠약하여 망하는 틈을 타서 예전 거란의 유족들이 일어나서 동진국(東眞國)을 건설하였으나 다시 신흥하는 몽고족에 쫓기어 고려(高麗)로 몰려 왔으므로 그것을 방어하기 위한 싸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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