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동발발江東撥發, 강동보병江東步兵, 강동부녀업하풍속江東婦女鄴下風俗, 강동삼해江東三害

강동발발[江東撥發] 강동(江東)은 송대(宋代)의 행정구역(行政區域)이었던 강남동로(江南東路)의 약칭(略稱)이고, 발발(撥發)은 경사(京師)에 공급(供給)할 조운(漕運)을 담당한 발발사(撥發司)의 약칭이다.

강동보병[江東步兵] 동진(東晉) 때의 유명한 문인인 장한(張翰)을 일컫는 말이다. 보병(步兵)은 보통 진()나라 때의 문인으로 죽림칠현의 한 사람으로 보병교위(步兵校尉)를 지낸 완적(阮籍)의 별명으로 쓰이는데, 장한(張翰)이 세상의 구속을 받지 않고 자기의 뜻대로 살았으므로 강동(江東) 오군(吳郡) 출신인 그를 완보병(阮步兵)이라 불리던 완적(阮籍)에 비견하여 강동보병(江東步兵)이라고 불렀다. 완적(阮籍)은 본래 술을 매우 좋아했는데, 한번은 보병영(步兵營)의 영주(營廚)에 좋은 술이 300()이나 있다는 말을 듣고는 이에 자청하여 보병 교위(步兵校尉)가 되어 날마다 술만 곤드레가 되도록 마시고 세상일에 대해서는 상관하지 않았다는 고사가 있다. 장한(張翰) 또한, 사람들이 마음대로 행동하면 지금은 좋겠지만, 죽은 뒤의 이름은 생각하지 않느냐.”라고 묻자, “죽은 뒤에 얻는 명성보다는, 생전에 마시는 한 잔의 술이 더 낫다.[使我有身後名, 不如卽時一杯酒.]”고 대답한 고사가 전한다. <世說新語 任誕> <晉書 卷92 文苑列傳 張翰>

강동부녀 업하풍속[江東婦女 鄴下風俗] 안씨가훈(顔氏家訓) 치가(治家)강동 지방의 부녀자들은 조금도 교유함이 없어, 심지어 혼인을 맺은 사돈 집안끼리도 혹 십수 년 동안 얼굴을 모르고 지내기도 한다. 오직 안부를 전하거나 인사 물품을 보내 주는 것으로 은근한 정을 표할 뿐이다.[江東婦女 略無交遊 其婚姻之家 或十數年間 未相識者 唯以信命贈遺 致慇懃焉]”라고 하였고, 업하 지방의 풍속은 오직 부인이 가문을 유지한다. 시비를 가려 송사하기도 하고, 손님 초청과 접대도 하고, 아들을 대신해 관직을 구하러 다니기도 하고, 남편을 위해 관청에 억울함을 호소하기도 한다. 이것은 바로 항()과 대() 지방의 유풍이다.[鄴下風俗 專以婦持門戶 爭訟曲直 造請逢迎 代子求官 爲夫訴屈 此乃恒代遺風乎]”라고 하였다.

강동삼해[江東三害] 강동(江東)의 세 가지 폐해. ()나라 양선(陽羨) 사람 주처(周處)는 젊었을 때 힘이 세고 난폭하며 못된 짓을 많이 하여 마을에 해를 끼치고 다녔다. 주처가 어느 날 부로(父老)에게 시절도 좋고 농사도 풍작인데 어찌하여 즐거워하지 않습니까?[今時和歲豐, 何苦而不樂耶?]”라고 묻자, 부로가 한숨을 쉬며 답하기를 세 가지 폐해가 제거되지 않았는데 무슨 즐거움이 있겠는가.[三害不除, 何樂之有.]”라고 하였다. 세 가지 폐해가 무엇인지를 묻자, 부로가 남산(南山)에 있는 이마가 흰 호랑이[白額虎]와 장교(長橋) 아래에 사는 이무기와 자네와 셋이라네.[南山白額虎, 長橋下蛟, 並子為三矣.]”라고 하였다. 주처는 그 정도 근심거리는 내가 제거할 수 있습니다.[若此爲患, 吾能除之.]”라 하고, 호랑이를 때려잡고 이무기를 죽였으나, 사람들이 도리어 그를 더욱 두려워하였다. 이후 주처는 열심히 학문을 닦고 자신을 다스려 훌륭한 인물이 되었으며, ()나라에서 벼슬하여 어사중승(御史中丞)이 되었다. 뒤에 제만년(齊萬年)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토벌하러 가 후퇴하지 않고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晉書 卷58 周處列傳>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