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두江頭, 강등糠燈, 강라絳羅, 강락개도康樂開道, 강락과혜련康樂誇惠連

강두[江頭] 강 언저리. 강가의 나룻배 타는 곳. 강가의 나루 근처. 강기슭. 강가. 강 언덕. 참고로, 두보(杜甫)의 시 애강두(哀江頭)강변의 궁전은 수많은 문 닫았는데, 가는 버들 새 부들 풀은 누굴 위해 푸르른가.[江頭宮殿鎖千門 細柳新蒲爲誰綠]”라고 하였고, 곡강(曲江)퇴청해서는 나날이 봄옷을 전당 잡혀, 날마다 강 머리에서 실컷 취해 돌아오네.[朝回日日典春衣 每日江頭盡醉歸]”라고 하였고, 백거이(白居易)의 시 비파행(琵琶行)심양의 강가 어느 날 밤 객을 전송하는데, 단풍잎 갈대꽃에 갈바람 쓸쓸하였어라.[潯陽江頭夜送客 楓葉荻花秋瑟瑟]”라고 하였다.

강등[糠燈] 옛날 촌가에서 소자유(蘇子油: 들기름)의 찌꺼기를 속강(粟糠)에 혼합하여 여기에 불을 붙여서 등()처럼 사용했던 것을 말한다.

강라[絳羅] 붉은 빛이 나는 가는 비단을 가리킨다.

강락[康樂] 남조(南朝) ()나라 시인 사령운(謝靈運)으로, 조부의 작위 강락(康樂)을 물려받아 강락공(康樂公)에 봉해진 뒤 사강락(謝康樂)으로 불렸다. 영가태수永嘉太守를 지냈다. 서화(書畫)와 시문(詩文)에 능했으며 등산을 좋아했다. 사령운이 영가태수로永嘉太守로 나가 있을 때, 그곳에 이름난 산수가 많은 것을 매우 좋아하였는데, 한번 나가면 열흘이나 보름씩 관청의 일을 내팽개치고 돌아오지 않은 채 보고 느낀 것들을 시로 지어 사람들에게 보냈다고 전한다. 사영운(謝靈運)은 어려서부터 문장이 뛰어나 강좌(江左)에서 비견될 자가 없었으나, 성격이 편협하여 사람들과 잘 부딪쳤다. 조정에서 자신을 문장으로만 대우해 주고 실권을 주지 않는 데 불만을 품어 벼슬을 버리고 회계(會稽)로 물러나 살면서 몹시 화려한 장원(莊園)을 만들고는 마음껏 즐겼다. 그러나 뜻은 항상 조정에 있어서 정사에 관여하다가 마침내는 기시(棄市)되고 말았다. <宋書 卷67 謝靈運列傳>

강락개도[康樂開道] 강락은 남조 시대(南朝時代) () 나라의 서화가(書畫家)이자 문장가인 사영운(謝靈運)의 봉호(封號)이다. 그는 산수를 좋아하였는데, 한번은 수백 명을 동원하여 시령(始寧)의 남산(南山)에서부터 임해(臨海)까지 나무를 베어내고 곧바로 길을 내니, 임해 태수 왕수(王琇)가 크게 놀라 산적(山賊)이라 하였다. <宋書 謝靈運傳>

강락공[康樂公] 남북조(南北朝) 시대 동진(東晉)과 송() 양대에 걸쳐 활약했던 시인이자 문신인 사령운(謝靈運)으로, 동진 때 조부 사현(謝玄)을 이어 강락공(康樂公)에 습봉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칭한 것이다. 송나라에 들어와 정치적으로 불우하여 정무(政務)를 돌보지 않고 명승(名勝)을 유람하다가 관직에서 물러나 정교하고 섬세한 시어로 산수의 아름다움을 읊어 중국 산수시(山水詩)의 비조(鼻祖)가 되었다.

강락과혜련[康樂誇惠連] 강락(康樂)은 남조(南朝) ()의 문인 사령운(謝靈運)의 봉호(封號)이고, 혜련(惠連)은 사령운의 족제(族弟)인 사혜련(謝惠連)을 가리킨다. 사령운이 영가(永嘉)의 서당(西堂)에서 온종일 시를 생각했으나 시상이 떠오르지 않아 고민하다가 꿈에 족제(族弟)인 사혜련(謝惠連)을 만나 보고 못가에 봄풀이 난다.[池塘生春草지당생춘초]’라는 명구를 얻은 뒤에 이 시구는 신령이 도와준 덕분에 나온 것이지 나의 말이 아니다.[此語有神功 非吾語也]”라고 술회한 고사를 두고 한 말이다. <南史 卷19 謝惠連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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