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산弇山, 감산甘山, 감산柑山, 감산憨山, 감산덕청憨山德淸

감산[弇山] 감산(弇山)은 명()나라 왕세정(王世貞)을 말한다. 호를 감주산인(弇州山人)이라고도 했던 왕세정은 시()와 고문(古文)을 좋아하여, 역시 시와 고문으로 당대 이름을 날린 이반룡(李攀龍)과 함께 문맹(文盟)을 주관하였다. <明史 卷二百八十七>

감산[甘山] 이황중(李黃中)의 호이다. 자는 공일(公一), 본관은 하음(河陰)이다. 창강(滄江) 김택영(金澤榮)이 지은 감산자전(甘山子傳)에 의하면, 2세 때 마음으로 문자를 알았고, 7세에 시를 지을 만큼 시재가 뛰어났으며, 오로지 시를 공부하여 만당의 풍이 있었다. 김정희(金正喜)가 그의 시를 보고 우리나라 천년의 절향(絶響)이라고 감탄하였다. 노담을 사모하였고, 단학에 심취하였다. 사람됨이 맑고 기이하여 시세에 부앙(俯仰)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창강이 그의 시 90수를 모아 한 권을 만들어 회남(淮南)에서 간행하였고, 심재에게 서문을 부탁하였는데, 암서집(巖西集) 18에 이감산시선서(李甘山詩選序)가 있다.

감산[柑山] 제주도 대정현 감산리이다.

감산[憨山] () 나라의 고승(高僧) 덕청(德淸)을 가리킨다. 당시에 감산대사(憨山大師)라고 불렀다.

감산덕청[憨山德淸] ()나라 말기의 고승으로 속성은 채씨(蔡氏), 자는 징인(澄人), 호는 감산(憨山), 시호는 홍각선사(弘覺禪師)이다. 안휘성(安徽省) 전초(全椒) 사람이다. 임제종 문하에서 선종을 부흥시켰고 자백진가(紫柏眞可)와 깊이 교유했는데, 두 사람은 운서주굉(雲棲袾宏), 우익지욱(蕅益智旭)과 함께 명말(明末)4대 고승으로 꼽힌다. 11세 때 보은사(報恩寺) 서림영녕(西林永寧) 법사의 문하로 들어가 불교경전은 물론 유교와 도교의 경전을 함께 배웠다. 19세 때 서하산(棲霞山)으로 가서 운곡법회(雲谷法會) 선사를 알현하고 중봉광록(中峰廣錄)을 배운 뒤, 참선을 결심하고 보은사로 돌아와 삭발하고 출가했다. 화엄현담(華嚴玄談)을 읽은 뒤 청량징관(淸凉澄觀)을 본받고자 스스로 호를 징인(澄人)으로 지었다. 신종(神宗) 만력(萬曆) 원년(1573) 오대산에 갔을 때, 감산(憨山)의 풍치가 마음에 들어 호를 삼았다. 만력 14(1586)에는 신종이 대장경(大藏經) 15부를 천하의 명산 사찰로 보냈는데, 태후가 그 중 한 부를 동해 뇌산(牢山: 청도靑島 노산崂山)에 있는 덕산에게 보냈고, 조정에서는 뇌산에 해인사(海印寺)를 건립하고 감산에게 주지를 맡아주기를 청했다. 만력 23(1595)에는 조정의 정쟁에 연루되어 광동의 뇌주(雷州)로 쫓겨나기도 했는데, 그곳에서 선법을 널리 퍼뜨리면서 선종과 화엄종의 융합 및 유불도 삼교의 합일을 주장하였다. 그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이 많아 그가 옛 오나라 땅에 머문 5년 동안 강남과 강북이 밝은 법으로 가득했다. 훗날 감산은 뇌산 해인사에서 법화경통의(法華經通義), 장자내편주(莊子內篇註) 10여 종을 지었고, 그의 문도들은 감산몽유집(憨山夢遊集) 50권과 감산어록(憨山語錄) 20권을 엮었다. 천계(天啟) 3(1623)에 세속 나이 78세로 입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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