對酒五首其四대주5수4 / 평생에 건강한 날이 / 白居易백거이

百歲無多時壯健[백세무다시장건]  백 년을 산들 건강한 때 얼마이며

一春能幾日晴明[일춘능기일청명]  봄철이라 한들 맑은 날 그 얼마랴

相逢且莫推辭醉[상봉차막추사취]  이렇게 만났으니 마다말고 취하여

聽唱陽關第四聲[청창양관제사성]  양관의 서글픈 이별가나 들으세나

 

<對酒五首[其四]대주54 / 앞에 술을 두고 / 白居易백거이>

 

백거이[白居易] ()나라 때 시인으로 자는 낙천(樂天), 호는 향산거사(香山居士) 또는 취음선생(醉吟先生)이다. 조적(祖籍)은 산서(山西) 태원(太原)이고, 이백(李白)이 죽은 지 10, 두보(杜甫)가 죽은 지 2년 후에 하남(河南) 신정(新鄭)에서 태어났다. 정원(貞元) 16(800)에 진사가 되어, 벼슬은 소주(蘇州항주(杭州)의 자사를 거쳐 만년에 태자소부(太子少傅)에 지냈고, 형부상서(刑部尙書)로 치사(致仕)하였다. 향산(香山)에서 지내다가 세상을 뜬 뒤 낙양(洛陽) 남쪽 향산의 비파봉(琵琶峰)에 묻혔다. 시호는 문()이다. 세상 사람들이 백부(白傅) 또는 백문공(白文公)으로 불렀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5세 때부터 시 짓는 법을 배웠으며 15세가 지나자 주위 사람을 놀라게 하는 시재를 보였다 한다. 이백(李白), 두보(杜甫)와 더불어 당대3대시인(唐代三大詩人)으로, 같은 시대의 한유(韓愈)와 더불어 이두한백(李杜韓白)으로 병칭된다. 원진(元稹)과는 함께 신악부운동(新樂府運動)을 이끌어 원백(元白)으로, 유우석(劉禹錫)과는 유백(劉白)으로 병칭되며 당시 으뜸으로 쳤다. 백거이는 시의 제재가 광범위하고 형식이 다양하며 언어가 평이하고 통속적이어서 시마(詩魔) 또는 시왕(詩王) 등의 칭호를 얻었다. 그는 시론을 통해 자신의 시작의 첫째 목적은 겸제(兼濟)의 뜻을 살린 풍유(諷諭)에 있다고 현실주의적인 견해를 밝히고 있고, 스스로 자신의 시집을 편집하면서 시를 풍유시(諷諭詩), 한적시(閑寂詩), 감상시(感傷詩), 잡률(雜律詩)의 네 종류로 분류하였다. 만년에는 세상일에 대하여 고민하고 방황한 끝에 한적을 좋아하는 태도로 발전한다. 저서에 백씨장경집(白氏長慶集백씨육첩사류(白氏六帖事類) 등이 전한다. 장한가(長恨歌), 매탄옹(賣炭翁), 비파행(琵琶行) 등을 대표적인 시로 꼽는다.

추사[推辭] 물러나며 사양함.

양관제사성[陽關第四聲] 양관(陽關)은 고대 관문(關門)의 명칭으로, 지금의 감숙성(甘肅省) 돈황현(敦煌縣) 서북쪽이다. 양관곡은 위성곡(渭城曲) 혹은 양관삼첩(陽關三疊)이라고도 불리며, 소동파는 이 시의 창법을 여러 가지로 정리하기도 하였는데, 그 창법 중에 하나가 앞의 세 구는 한 번 창()하고, 4구만 세 번 중첩하여 창()하는 방법인데 간단하면서도 음악적인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훗날, 벗을 송별할 때 불러주는 송별가(送別歌)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양관[陽關] 돈황시(敦煌市) 서남쪽에 있다. 기원후 121년 서한의 무제가 서역을 경영하기 위해 하서주랑(河西走廊)에 돈황 등 4개 군을 설치하고 양관(陽關)과 옥문관(玉門關)을 세웠다. 서한이래로 역대 왕조들이 군사요충지인 이곳으로 군사를 보내 지켰다. 많은 군사들이 이곳을 지키기 위해 싸웠고, 상인과 승려, 사신, 여행객 등 많은 사람들이 또한 이곳을 내왕했다. 특히 문인들이 이곳에서 감회를 읊은 작품이 많다.

양관곡[陽關曲] 본명은 위성곡(渭城曲)이다. 진시황이 수도로 삼았던 함양(咸陽)은 당대(唐代)에는 위성(渭城)으로 불렸다. 당시 변방인 양관(陽關)으로 떠나는 사람들을 위해 이곳에서 송별연을 베풀고 전송했다. 왕유(王維)의 시 송원이사안서(送元二使安西)는 그런 정경을 읊은 것 중에 잘 알려진 작품이다. 이 시는 일명 위성곡(渭城曲) 또는 양관곡(陽關曲)이라고도 한다. 양관곡이라고 하면 보통 이별가의 대명사로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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