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라甘羅, 감라힐장당甘羅詰張唐, 감란이무수성이문戡亂以武守成以文
❍ 감라[甘羅] 감라(甘羅)는 전국(戰國) 때 하채(下蔡) 사람으로, 진 무왕(秦武王)의 승상(丞相)이었던 감무(甘茂)의 손자로, 어린 나이에 큰 공을 세워 상경(上卿)에 봉해진 인물이다. 12세 때 진(秦)나라 재상 여불위(呂不韋)의 가신(家臣)이 되어, 시황제(始皇帝)의 사명(使命)을 받들고 조(趙)나라에 사신으로 나가 조 양왕(趙襄王)을 설득하여 조(趙)나라 다섯 성(城)을 떼어 받고, 또 양왕으로 하여금 연(燕)나라를 쳐 30개의 성을 빼앗고 그중 11개를 진(秦)나라에 바치게 하였다. 그 공으로 진시황으로부터 상경(上卿)에 봉해지고, 일찍이 자기 조부(祖父)인 감무가 소유했던 전택(田宅)을 다 하사받았다.<史記 卷71 樗里子甘茂列傳>
❍ 감라힐장당[甘羅詰張唐] 감라(甘羅)가 장당(張唐)을 힐문함. 감라(甘羅)는 12세로 진(秦)나라의 승상(丞相) 문신후(文信侯) 여불위(呂不韋)를 섬겼다. 진시황(秦始皇)이 강성군(剛成君) 채택(蔡澤)을 연(燕)나라에 사신으로 보내니 연왕(燕王) 희(喜)는 태자(太子) 단(丹)을 진(秦)나라에 인질(人質)로 들어가게 하였다. 진(秦)나라는 장당(張唐)으로 하여금 연(燕)나라의 재상이 되게 하려고 하였다. 장당(張唐)이 가려 하지 않자 문신후(文信侯)는 불쾌해하였다. 소서자(少庶子) 감라(甘羅)가 장당을 설득해 보겠다고 하자 문신후가 “내 스스로 찾아갔어도 가려 하지 않았는데 네가 어찌 그를 가게 할 수 있겠느냐?[我自行之而不肯, 汝安能行之也?]”라고 하였다. 이에 감라가 “무릇 항탁(項橐)은 7세에 공자(孔子)의 스승이 되었습니다. 제가 벌써 열두 살인데 군께서는 저를 시험해 볼 것이지 어찌 급하게 꾸짖는 말씀만 하십니까?[夫項橐生七歲而爲孔子師, 今臣生十二歲於玆矣! 君其試臣, 奚以遽言叱也?]”라고 하였다. 이에 문신후가 허락하니, 감라(甘羅)가 장당(張唐)을 만나 말하기를 “경(卿)의 공은 무안군(武安君: 장군 白起백기)에 비해 어떻습니까?”라고 물었다. 장당이 “무안군(武安君)보다 못하네.”라고 하였다. 감라(甘羅)가 말하기를 “응후(應侯: 승상 范睢범수)가 진(秦)나라에 등용된다 한들 문신후(文信侯)처럼 국정을 오로지 하겠습니까?”라 하니, 장당(張唐)이 “응후(應侯)가 문신후(文信侯)처럼 오로지 못하겠지.”라고 하였다. 감라(甘羅)가 말하기를 “응후(應侯)가 조(趙)나라를 치려 할 때 무안군(武安君)이 난처하게 여기자 함양(咸陽)에서 7리를 떠났을 즈음 두우(杜郵)에서 목을 매어 죽였습니다. 지금 문신후(文信侯)께서 경(卿)을 연(燕)나라의 재상이 되기를 청하였는데 경은 떠나려 하지 않으시니, 저는 경이 언제 어디서 피살될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장당(張唐)이 말하기를 “청컨대 동자(童子)님의 말씀을 따라 가겠네.”라 하고는 마침내 짐을 꾸려 곧바로 떠났다. <戰國策 秦策>
❍ 감란이무 수성이문[戡亂以武 守成以文] 반란을 평정하는 것은 무(武)로써 하지만 이루어 놓은 기업(基業)을 지키는 것은 문(文)으로써 한다는 뜻이다. 통감절요(通鑑節要) 당기(唐紀) 태종황제 상(太宗皇帝 上)에 “혼란을 평정함은 무(武)로써 하지만 이루어 놓은 기업(基業)을 지키는 것은 문(文)으로써 하니, 문(文)과 무(武)의 쓰임은 각각 그때를 따르는 것이다. 그런데 경(卿)은 문(文)이 무(武)만 못하다고 말하니, 이 말이 잘못되었다.[戡亂以武, 守成以文. 文武之用, 各隨其時. 卿謂文不及武, 斯言過矣.]”라고 한 데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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