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악艮嶽, 간악부艮嶽賦, 간악화석강艮嶽花石綱, 간알干謁, 간애약야看隘若耶

간악[艮嶽] 간악은 지금의 중국 하남성(河南省) 개봉(開封)에 있던 인공으로 만든 산으로 만세산(萬歲山)이라고도 부른다. 도성의 간방(艮方)에 있으므로 간악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송나라 정화(政和) 7(1117) 휘종(徽宗)이 이 산을 조성하고 간악부(艮嶽賦)를 지었다. 강남의 기화 괴석(奇花怪石)을 징발하여 간악을 치장함으로써 막대한 노동력과 재화가 소모되었으므로 북송이 금나라에게 멸망하게 된 하나의 빌미가 되었다. <宋史 卷470 佞幸列傳 朱勔>

간악[艮嶽] 송 휘종(宋徽宗)이 만든 산인데, 지금 하남(河南) 개봉성(開封城) 내의 동북쪽 모퉁이에 있다. 휘종 정화(政和) 7년에 변량(汴梁) 동북쪽에 만세산(萬歲山)을 만들고, 선화(宣和) 4년에 휘종이 스스로 간악기(艮嶽記)를 지으면서 산이 국도(國都)의 간방(艮方)에 있기 때문에 간악(艮嶽)으로 이름을 붙였다.”라고 하였다.

간악[艮嶽] 하남성(河南省) 개봉현(開封縣) 성안 동북쪽에 있는 산 이름이다. 송 휘종 때 금성(禁城) 동쪽에 진귀한 화석(花石)을 모아 쌓은 만수산(萬壽山)을 일컬으며, 일명 수봉(壽峯)이라고도 한다.

간악무도[奸惡無道] 간사하고 악독하며 도리에 어긋남을 이른다.

간악부[艮嶽賦] 간악은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개봉(開封)에 있는 인공으로 만든 산인 만세산(萬歲山)으로, 국도의 간방(艮方)에 위치해 있으므로 간악이라고 부른다. 송 나라 정화(政和) 7년에 이 산을 만들고는 휘종(徽宗)이 간악부(艮嶽賦)를 지었다.

간악화석강[艮嶽花石綱] 송 휘종(宋徽宗)은 변량(汴梁) 동북쪽에 만세산(萬歲山)을 만들고서 친히 간악기(艮岳記)를 지었는데, 이 산이 도성의 간위(艮位)에 해당하기 때문에 간악(艮岳)이라 한 것이다. 당시 주면(朱勉)은 강남(江南) 지방의 기화(奇花), 괴석(怪石) 등 휘종의 환심을 살 만한 것들을 모두 개봉(開封)으로 옮기게 하였는데, 이를 화석강(花石綱)이라고 한다. ()은 물건을 대량으로 발송할 적에 자호(字號)에 따라 조()로 편성한 화물을 말하는데, 1()1()이다.

간알[干謁] 벼슬을 구하기 위해 세력가(勢力家)를 알현(謁見). 지위가 높은 사람을 만나 바라는 것이나 구하는 것을 청하는 것을 가리킨다.

간암서원[艮庵書院] 평안북도 정주에 있는 서원으로, 이희조(李喜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1731(영조7)에 진사 김수석(金壽錫)을 중심으로 지방유림이 발의하여 세워졌다가 서원철폐령으로 1868(고종5) 훼철되었다. 이희조(李喜朝)는 자는 동보(同甫), 호는 지촌(芝村), 간암(艮菴)은 별호,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부친은 부제학 단상(端相), 박세채의 조카이다. 송시열의 제자로, 1721(경종1) 신임사화로 노론 4대신이 유배당할 때, 영암에 유배되고 철산으로 이배되다가 죽었다. 1725(영조1) 신원되어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간애약야[看隘若耶] 구경꾼이 약야계(若耶溪)를 메움. 월나라 서시(西施)5월 경호에서 연밥을 따니 구경하는 사람들이 약야계(若耶溪)를 메웠다는 말이다. 약야(若耶)는 월주(越州)에 있는 경호(鏡湖)와 이어진 물 이름이다. 당나라 이백(李白)의 시 자야오가(子夜吳歌)경호 삼백 리에, 연꽃이 흐드러지게 폈네. 오월에 서시가 연밥을 따면, 구경하는 사람들 약야계에 넘치는데, 달뜨기도 전에 배를 돌려서, 월왕의 궁궐로 돌아가네.[鏡湖三百里 菡蓞發荷花 五月西施採 人看隘若耶 回舟不待月 歸去越王家]”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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