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당甘棠, 감당憇棠, 감당監當

감당[甘棠] 감당(甘棠)은 주()나라 때 백성들이 훌륭한 정사를 행했던 소공 석(召公奭)을 찬미한 노래이다. 시경(詩經) 소남(召南) 감당(甘棠)무성한 감당 나무 자르지 말고 베지 말라. 소백께서 초막으로 삼으셨던 곳이니라.[蔽芾甘棠, 勿翦勿伐, 召伯所茇.]”라는 구절이 보이는데, 주희(朱熹)의 주에 따르면 백성들이 소공의 덕()을 그리워하여 소공이 순행하면서 잠시 머물렀던 나무마저도 아껴서 차마 손상하지 못한 것을 노래한 것이다.

감당[甘棠] 시경(詩經) 소남(召南) 감당(甘棠)()나라 소공 석(召公奭)이 남국(南國)을 순시하다가 팥배나무의 밑에서 민원을 처리해 주었는데, 후세의 사람들이 그를 사모하여 그 팥배나무를 차마 베지 못하였다.”라고 하였다. 감당은 팥배나무이고 소백(召伯)은 주()나라 소공 석(召公奭)이다. 시경(詩經) 감당(甘棠)소백이 남국(南國)을 순시하다가 팥배나무의 밑에서 민원을 처리해 주었는데, 후세의 사람들이 그를 사모하여 그 팥배나무를 차마 베지 못하였다.”라고 하였다. 이를 후세에서 선정(善政)을 비유하는 고사로 사용하였다.

감당[甘棠] 감당은 시경(詩經) 소남(召南)의 편명이자 나무 이름으로 곧 당리(棠梨)이다. 시경(詩經) 소남(召南) 감당(甘棠)무성한 감당나무를 자르지도 말고 베지도 말라. 소백께서 그 그늘에 쉬셨던 곳이니라.[蔽芾甘棠 勿剪勿伐 召伯所茇]”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나라 문왕(文王) 때 남국(南國)의 백성들이 소백(召伯)의 선정에 감사하는 뜻에서 그가 머물고 쉬었던 감당나무를 소중히 여겨서 이렇게 노래한 것이라 한다. 지방관이 선정을 베풀어 그가 떠난 뒤에 백성들이 그 은덕을 잊지 않음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감당[甘棠] 시경(詩經) 소남(召南)의 편명인데, 보통 방백(方伯)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주 무왕(周武王) 때 소공(召公) 희석(姬奭)이 서백(西伯)으로 선정을 베풀었으므로, 백성들이 그를 추모한 나머지 그가 잠시 그늘 아래 쉬었던 감당나무를 기념하여 잘 가꾸며 보존하는 한편, 이를 노래로 지어 불렀다는 고사가 전한다.

감당[甘棠] 감당(甘棠)은 시경(詩經) 국풍(國風) 소남(召南)에 실린 시로서, 어진 관리의 아름다운 정사를 찬미하는 노래이다. ()나라 때 소공(召公) 북연(北燕)에 봉해져서 감당나무 아래에서 어진 정사를 펼쳤는데, 소공이 죽은 뒤에 백성들이 소공을 그리워해 감당나무를 감히 베지 못하고 감당(甘棠) 시를 지어 그를 기렸다고 한다. 그 시에 무성한 저 감당나무 가지를, 자르지도 말고 꺾지도 말라. 우리 소백이 쉬시던 곳이니라.[蔽芾甘棠, 勿翦勿敗. 召伯所憩.]”라고 하였다. 그로부터 3, 4백 년이 지난 뒤 춘추 시대 한선자가 정()나라에 갔다가 역시 나무 그늘에서 쉬었는데, 정나라 사람들이 소백의 고사를 말하면서 한선자가 머물렀던 나무를 오래 기념하겠다고 말하였다. <史記 卷34 燕召公世家> <春秋左氏傳 昭公2>

감당[甘棠] 감당(甘棠)은 팥배나무로, 장미과에 속하는 낙엽 활엽 교목의 하나이다. 지방관의 선정(善政)을 상징한다. ()나라 소공 석(召公奭)이 남쪽 나라들을 순행하며 문왕(文王)의 정사를 펴던 중에 가끔 팥배나무 밑에서 휴식을 취하곤 하였다. 그가 떠난 뒤에 백성들이 그의 은덕을 기려 그 팥배나무를 차마 손상하지 못했다고 한다. 시경(詩經) 소남(召南) 감당(甘棠)무성한 저 팥배나무를 자르지도 말고 베지도 말라. 소백께서 쉬시던 곳이다.[蔽芾甘棠 勿剪勿伐 召伯所憩]”라고 하였다.

감당[憇棠] 시경(詩經) 감당(甘棠)무성한 팥배나무를 베지 말고 꺾지 말라. 소백(召伯)이 쉬시던 곳이니라.[蔽芾甘棠 勿翦勿敗 召伯所憩]”라는 시에서 따온 말이다. 이는 주 문왕(周文王)의 아들 소공 석(召公奭)이 덕교(德敎)를 베풀어 백성들이 오래도록 칭송한다는 시 전체의 내용을 두 자로 축약한 말이다.

감당[監當] 송대(宋代)에 차, 소금, 술 등의 세금을 거두고 철물을 주조하는 등의 일을 관리하는 지방관이다. <宋史 職官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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