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당奸黨, 간당비姦黨碑, 간당적奸黨籍, 간당지화奸黨之禍, 간대부諫大夫
❍ 간당[奸黨] 간사(奸邪)한 사람들의 무리. 간당(姦黨). 송(宋)나라 철종(哲宗) 원우(元祐) 연간에 장돈(章惇)과 채경(蔡京) 등이 결탁하여 사마광(司馬光), 문언박(文彦博), 정이(程頤), 소식(蘇軾) 등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에 반대한 학자와 문인(文人) 309인을 간당으로 몰아 유배하고 금고한 일이 있다.
❍ 간당비[姦黨碑] 송 철종(宋哲宗) 원우(元祐) 원년에 사마광(司馬光)이 재상이 되어 신종(神宗) 희령(熙寧)·원풍(元豐) 연간에 왕안석(王安石)이 시행한 신법(新法)을 전부 폐지하고 옛날의 제도를 회복하였다. 그 뒤 소성(紹聖) 원년에 장돈(章惇)이 재상이 되어 희령·원풍의 제도를 회복하고 사마광을 간당(奸黨)으로 지척하여 조정에서 축출하였다. 휘종(徽宗) 숭녕(崇寧) 원년에 채경(蔡京)이 재상이 되어 소성 연간의 법을 전부 회복한 다음 단례문(端禮門)에다 신법을 반대한 사마광 등 3백 9명의 죄상을 기록하여 세운 비석을 말한다.
❍ 간당비[姦黨碑] 송 철종(宋哲宗) 원우(元祐) 1년(1085)에 사마광(司馬光)이 재상이 되고 나서 왕안석(王安石)이 신종(神宗) 때에 실시한 신법(新法)을 모두 폐지하고 옛 법을 회복하였는데, 소성(紹聖) 1년(1094)에 장돈(章惇)이 재상이 된 뒤에 다시 사마광 등을 배척하여 조정에서 축출하였으며, 휘종(徽宗) 숭녕(崇寧) 1년(1102)에 채경(蔡京)이 재상이 된 뒤에는 사마광·문언박(文彦博)·소식(蘇軾)·정이(程頤) 등 120인을 간당(姦黨)으로 지목하여 이른바 원우간당비(元祐姦黨碑)를 세우고, 다시 사마광 이하 309인을 기록하여 원우당적비(元祐黨籍碑)를 세운 뒤에 천하에 반포한 고사가 있다. <宋史 卷19 徽宗本紀, 卷472 姦臣列傳2 蔡京>
❍ 간당적[奸黨籍] 간당적은 원우간당비(元祐奸黨碑)의 사건에서 온 말이다. 송 휘종(宋徽宗) 때에 간신 장돈(章惇)·채경(蔡京)·채변(蔡卞) 등이 권력을 잡고 원우현사(元祐賢士)로 불리는 사마광(司馬光)·정이(程頤)·소식(蘇軾)·유지(劉摯) 등 120인을 간당이라 하여 그 성명을 돌에 새겨 단례문(端禮門) 밖에 세웠다가 성변(星變)으로 인해 그 비석을 깨뜨려 버렸는데, 그 뒤에 당적에 든 사람의 자손들이 오히려 그들 선조의 이름이 당적비에 들어간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여 다시 모각(摹刻)하였다. <宋史 卷472 蔡京傳>
❍ 간당지화[奸黨之禍] 송 신종(宋神宗) 때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에 반대하는 사마광(司馬光), 문언박(文彦博), 소식(蘇軾), 정이(程頤) 등 120인을 간당으로 지목하여 원우간당비(元祐奸黨碑)를 세우고, 다시 사마광 이후 309인을 기록하여 원우당적비(元祐黨籍碑)를 세운 뒤 천하에 반포하게 한 일을 말한다.
❍ 간대부[諫大夫] 관직명이다. 정사를 의론하는 데 참여하였으며 정원이 없어 수십 명에 이르기도 하였다. 진(秦)나라 때 간대부(諫大夫)라 부르던 것을 후한 시대에 간의대부(諫議大夫)로 개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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