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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후[賈詡] 삼국 시대 위()나라 사람으로 동탁(董卓)의 밑에서 교위로 있다가 동탁이 죽자 이각(郭汜)과 곽사(郭汜)의 모주(謀主)가 되어 상서(尙書) 벼슬에 올랐다. 이각과 곽사가 다투자 조조(曹操)의 모신(謀臣)으로 귀순하여 원소(袁紹한수(韓遂마초(馬超) 등을 토벌하는 데 계책을 도왔고, 조비(曹丕)가 태자일 때부터 도와 문제(文帝)로 즉위하자 태위(太尉)가 되었으며, 위수향후(魏壽鄕侯)에 봉작되었다.

가후[歌喉] 노래하는 사람의 목구멍, 즉 노랫소리를 가리킨다.

가후[賈后] 가남풍(賈南風)이다. 평양(平陽) 양릉(襄陵) 사람이다. 서진(西晉) 혜제(惠帝)의 황후이자 권신(權臣) 가충(賈充)의 딸이다. 무제(武帝) 태시(泰始) 8(272)에 태자비가 되었고, 혜제가 즉위하자 황후가 되었다. 간모(姦謀)에 뛰어나고 황음방자(荒淫放恣)하며 포악하였는데, 키가 작고 검푸른 피부 빛깔을 하고 있었다 한다. 태후인 무원황후(武元皇后)의 아버지 양준(楊駿)이 정사를 보좌하였는데 혜제 영평(永平) 원년(291)에 초왕(楚王) 사마위(司馬瑋)를 시켜 살해하였고, 여남왕(汝南王) 사마양(司馬亮)을 태재(太宰)로 임명하였다가 사마위를 시켜 살해하였다. 얼마 뒤에 사마위를 제멋대로 죽였다[擅殺]’는 죄명을 씌워 죽였다. 가후는 소생이 없었는데 민회태자(愍懷太子) 사마휼(司馬遹) 정성을 다해 받들었는데도 그를 폐하고 마침내 죽임으로써 팔왕(八王)의 난()을 야기하였다. 뒤에 조왕(趙王) 사마륜(司馬倫)이 군대를 이끌고 궁성에 들어와 거짓 조서를 내려 가후를 사사(賜死)하고, 그 일족을 모조리 복주(伏誅)시켰다. <晉書 惠賈皇后傳>

가후거[賈侯渠] 가규(賈逵)는 위()나라 양릉(襄陵) 사람으로 자는 양도(梁道), 시호는 숙()이다. 벼슬은 강읍장(絳邑長예주자사(豫州刺史)를 역임하였다. 예주 자사 재임 중에 200리의 운거(運渠)를 개설하여 그 운거를 가후거(賈侯渠)라 불렀다. <三國志 卷15> 

가후양후[賈后楊后] 가후는 진 혜제(晉惠帝)의 황후이고 양후는 선대(先代)인 무제(武帝)의 황후로서 무도양황후(武悼楊皇后)를 가리킨다. 무제가 죽고 혜제가 즉위하자 양후는 황태후로 존숭되었는데, 가후에 의해 역모를 꾀했다는 무함을 받고 태후에서 폐위되어 서인(庶人)이 되었으며 급기야는 가후가 양후의 시어(侍御) 10여 인을 뺏고 음식물을 공급하지 못하게 하는 바람에 죽고 말았다. <晉書 卷31>

가훈[家訓] 집안의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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