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처勘處, 감척感慼, 감천戡天, 감천궁甘泉宮, 감천부甘泉賦

감처[勘處] 죄상을 감안하여 처단함. 형률(刑律)에 비추어 죄목을 감정하여 처리하는 것을 말한다.

감척[感慼] 느낌, 생각.

감천[甘泉] 감천궁(甘泉宮)을 가리킨다. 일명 운양궁(雲陽宮)으로 한 무제(漢武帝)의 행궁(行宮)이다. 현재 섬서성(陝西省) 순화(淳化) 서북쪽에 있는 감천산(甘泉山)에 있었다. <漢書辭典 甘泉宮> 본래 진()나라의 궁전이었는데, 한 무제(漢武帝)가 증축해 놓고 이곳에서 제왕(諸王)들의 조회를 받고 외국의 빈객들을 맞았으며, 여름에는 피서지로도 이용하였다. 사기(史記) 110 흉노열전(匈奴列傳)오랑캐의 기마병이 대구주(代句注)의 변새에 침입하자 봉화가 감천과 장안에 통보하였다.[胡騎入代句注邊 烽火通於甘泉長安]”라고 하였다.

감천[甘泉] 산 이름으로 지금의 섬서성(陝西省) 순화현(淳化縣) 서북쪽에 있었다. 속칭 마석령(磨石嶺)이라 한다. 진 이세(秦二世)가 이 산 위에 임광궁(林光宮)을 지었는데, 한대(漢代)에 감천궁(甘泉宮)으로 이름을 고쳤다.

감천[甘泉] 서한(西漢) 때 양웅(揚雄)이 성제(成帝)의 사냥을 내용으로 지어 올린 감천부(甘泉賦)를 가리킨다.

감천[戡天] 하늘을 이기다. 자연계를 통제하다.

감천궁[甘泉宮] 함양(咸陽) 남궁(南宮). 섬서성(陝西省) 순화현(淳化縣) 감천산(甘泉山)에 있는 한나라 때의 궁전으로 본디 진()나라의 궁궐이었는데, 뒤에 한 무제(漢武帝)가 방사(方士)인 공손경(公孫卿)의 말에 따라 이곳에 비렴관(蜚廉觀), 계관(桂觀), 통천대(通天臺) 등을 증축하고는 제후 왕들의 조회를 받고 외국의 사신들에게 잔치를 열어 주고, 피서지로 사용한 이궁(離宮)이다. 한 무제 때에 표기장군(驃騎將軍) 곽거병(霍去病)이 흉노를 정벌하고 금인(金人) 즉 불상을 노획해 오자, 이를 감천궁에 안치하고 분향하며 섬겼다. 참고로, 구익첩여(鉤弋婕妤)가 무제를 따라 감천궁에 갔다가 잘못을 저질러 견책을 당하자 근심하다가 죽었다. <魏書 卷114 釋老志> <漢書 卷97 外戚傳>

감천부[甘泉賦] 한 무제(漢武帝) 때 양웅(揚雄)이 지은 문장 제목으로, 궁궐의 아름다움에 대해 묘사하였다. 양웅이 일찍이 천자의 부름을 받고 대궐에 들어갔다가 뒤에 천자를 따라 감천궁(甘泉宮)을 다녀와서 감천부를 지어 올리자, 천자가 그것을 보고는 아주 기이하게 여겼다고 한다. 무제(武帝) 시대에는 부의 전성기였다. 왕실의 애호 아래 생겨나 발전함으로써 귀족적 형식적 경향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뒤이어 양웅·반고·장형 같은 부의 대가들이 나왔지만, 부는 형식적인 경향 때문에 모의의 수법이 더해만 갔다. 양웅의 감천부·우렵부·장양부·하동부는 사마상여의 모작이며, 광소·반로부 같은 것은 초사의 모방이다.

감천부[甘泉賦] ()나라 성제(成帝) 때 직숙랑(直宿郞) 양장(楊莊)이 양웅의 글이 사마상여와 같다 하여 그를 천거하였는데, 영시(永始) 4년 정월에 양웅이 성제를 따라 감천에 갔다가 제도(制度)가 장려(壯麗)한 것을 보고 이 부를 지어 풍자하였다 한다. <文體明辨 卷3 賦一上>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