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문관유민도監門官流民圖, 감문국甘文國, 감문기유敢問其遊, 감문정협監門鄭俠, 감민산삼십減民算三十

감문[甘文] 경상북도 김천 지역의 옛 지명으로, 지금의 경상북도 김천시 개령면(開寧面)이다.

감문[監門] 궁성 내외의 각 문을 지키는 일을 담당했던 군대를 이른다.

감문관유민도[監門官流民圖] 중국 송()나라 때 왕안석(王安石)의 신법이 폐해가 많아 감문관(監門官) 정협(鄭俠)이 왕안석에게 여러 번 그 폐해를 보고했지만 듣지 않았다. 그 후 정협은 왕안석이 듣지 않을 것을 알고 유민들의 처참한 모습을 그린 유민도(流民圖)를 상소와 함께 역마를 띄워 직접 올렸다. 신종이 유민도를 보고 탄식하며 신법을 중지하자 오랜 가뭄 끝에 단비가 내려 백성들이 기뻐하였다 한다. <宋史 卷321 鄭俠列傳>

감문국[甘文國] 지금의 경북 개령(開寧)이다. 신라 조분이사금 2(231) 7월에 이찬 우로(于老)에 의해 멸망하였다. <韓國地名沿革考 甘文國> <三國史記 卷2 新羅本紀2 助賁尼師今>

감문국[甘文國] 삼한 시대 부족국가로 현재 김천시 감문면과 개령면 일원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서기 231년 신라의 이찬(伊飡) 석우로(昔于老)에게 정벌되었고, 557년에 감문주로 개칭되었다.

감문기고[敢問其故] 감히 그 이유를 묻는다는 말이다.

감문기방[敢問其方] 감히 그 방법을 묻습니다. 감히 그 이치를 여쭙습니다. ()은 정(), (), (), () 등과 통용한다.

감문기유[敢問其遊] 제가 감히 그 까닭을 여쭙습니다. ()는 까닭. ()와 같다.

감문사여장가[監門司與仗家] 감문사(監門司)는 관서의 이름으로 궁문의 통행과 숙위하는 일을 관장하였다. 장가(仗家)는 궁문의 의장대이다.

감문정협[監門鄭俠] 정협(鄭俠)은 북송 신종(北宋神宗) 때 사람으로, 일찍이 상안문(上安門)을 감시하는 감문이라는 직책을 맡게 되었는데, 당시 왕안석(王安石)이 신법(新法)을 시행하여 큰 흉년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에게 세금과 관곡(官穀)을 가혹하게 징수하였다. 이에 정협은 백성들이 기아에 허덕이며 부역에 동원되는 참혹한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 황제에게 올리니, 이것을 본 자들은 모두 눈물을 흘렸다.

감물[感物] 사물을 보고 느끼는 감흥. 다른 것에 감동하거나 감화되는 것을 가리킨다.

감민산삼십[減民算三十] 백성의 산부(算賦: 정구세丁口稅)30() 감함. “()나라 초기부터 처음으로 산부(算賦)를 징수하여 사람마다 120()을 거두었고, 그 뒤에 또 구전(口錢)이 있었다. 구전(口錢)은 일찍이 2번 감하였으나 산부(算賦)는 그대로 두었었는데, 선제(宣帝)가 이때에 그 4분의 1을 감하였고 성제(成帝) 때에 또다시 산부(算賦)40전을 감하였으니, 백성들의 힘이 더욱 넉넉해지게 되었다.[自漢初 始爲算賦 人百二十 其後又有口錢 口錢嘗再減矣 而算賦仍舊 帝於是減其四分之一 至成帝而又減算四十 民力益寬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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