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탐군국지賈耽郡國志, 가태부賈太傅, 가태중賈太中, 가토加土, 가특苛慝

가탐군국지[賈耽郡國志] 가탐(賈耽)은 당 덕종(唐德宗) 때의 관인 학자로, 자는 돈시(敦詩)이다. 음양(陰陽잡수(雜數)에 능했고 특히 지리(地理)에 밝았다. 외국에 사신으로 갔다 온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찾아가 산천의 험이(險易), 도리(道里)의 광협(廣狹), 수원(水原), 토산(土産) 등을 자세히 물어 기록하고 그림으로 그렸다. 그가 편찬한 고금군국현도사이술(古今郡國縣道四夷述) 40권은 중국 부분은 우공(禹貢)을 바탕으로 기록하고, 외이(外夷)는 반고(班固)의 한서(漢書)를 바탕으로 엮은 것이다. 이외에도 <지도> 10, 정원십도록(貞元十道錄) 4권 등의 지리에 관한 저술이 있으나 실전되었다. <新唐書 卷58 藝文志2 地理類, 166 賈耽列傳>

가태[嘉泰] 남송(南宋)의 제2대 황제 영종(寧宗)의 두 번째 연호(1201~1204)이다.

가태부[賈太傅] 한문제(漢文帝) 때 장사왕태부(長沙王太傅)가 되었던 가의(賈誼)를 이른다. 치안책(治安策)에 대해 소를 올렸다. 가의가 소년 시절 제가(諸家)의 글에 통달하였는데, 문제가 그를 불러 박사(博士)를 삼았다가 태중대부(太中大夫)로 승진시켰다. 가의는 정삭(正朔)을 개정하고 복색을 변경하고 법도를 제정하고 예악을 일으켜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또 자주 상소를 올려 정사에 대해 말하면서 당시의 폐단에 대해 말하자, 대신들의 미움을 사 조정에서 쫓겨나 장사왕(長沙王)의 태부(太傅)로 폄적 되었다. 가의가 그곳에 가서는 시름 속에 나날을 보냈다. 상수(湘水)를 지나다가 초() 나라 충신 굴원(屈原)이 일찍이 상수에 빠져 죽은 것을 불쌍히 여겨 부를 지어서 상수에 던져[投湘賦투상부] 굴원을 조문하였다. 이윽고 양 회왕(梁懷王)의 태부로 옮겼다가 양회왕이 낙마하여 죽자 비통해하다 죽었는데, 그때 나이가 33세였다. 세상에서 그를 가태부(賈太傅)라 하기도 하고 가생(賈生)이라 하기도 한다. <漢書 卷48 賈誼傳>

가태중[賈太中] () 나라의 가의(賈誼)이다. 태중(太中)은 관명(官名)이다. 문재(文才)가 있었고, 최연소 박사가 된 중국 전한(前漢) 문제(文帝) 때의 문인 겸 학자이다. 진나라 때부터 내려온 율령·관제·예악 등의 제도를 개정하고 전한의 관제를 정비하기 위한 많은 의견을 상주했다. 당시 고관들의 시기로 장사 태부(長沙太傅)로 좌천되자 복조부(鵩鳥賦)와 조굴원부(弔屈原賦)를 지어 시사에 대한 울분을 토로하였다. 뒤에 한 문제(漢文帝)가 선실(宣室)에 불러들여 독대(獨對)하였다. 33세의 나이로 죽었다.

가토[加土] 흙으로 쌓은 무덤을 손질하기 위하여 흙을 더 덮거나 얹어 주는 일이다.

가통지사[可痛之事] 통탄(痛歎·痛嘆)할만한 일을 이른다

가특[苛慝] 포악하고 사악하다. 사납고 간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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