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주서假注書, 가준可遵, 가중명賈仲明, 가중연성價重連城, 가즉불곡歌則不哭

가주[家主] 집안의 주인을 말한다.

가주서[假注書] 사변가주서(事變假注書)의 약칭이다. 승정원(承政院)에 속한 정7(正七品) 벼슬. 주서(注書)가 사고를 당했을 때에 그 일을 대신 맡아보게 하기 위하여로 정원(定員) 이외로 둔 주서인데, 오로지 비변사(備邊司)와 국청(鞫廳)의 일을 맡아보았다.

가주서[假注書] 승정원(承政院)에서 주서(注書)가 사고가 있을 때 임시 임명하는 임시직이고, 승정원(承政院)의 정7품 벼슬인 사변가주서(事變假注書)를 가리키기도 하는데 정원 외의 주서로 비변사(備邊司)와 국청(鞫廳)의 일만을 맡아보았다.

가준[可遵] 북송(北宋) 때 복주(福州)에서 지낸 승려로 생몰연대와 속성, 관적 및 이력 등은 알려진 게 없지만 대략 신종(神宗) 희령(熙寧) 연간(1070년대)을 전후해서 살았던 것으로 보고 있다. 처음에는 복주 중제(中際)에 있다가 나중에 항주(杭州)에서 지냈는데 시에 능하여 소식(蘇軾), 양차공(楊次公) 등과 시를 주고받은 그를 사람들이 준대언(遵大言)이라고 불렀다. 시풍이 청량하고 언어를 다루는 솜씨가 뛰어났지만 그의 작품들은 대부분 산실되어 전하지 않는다.

가중[家中] 온 집안사람이다.

가중명[賈仲明] 명대의 잡극은 완전히 왕실 귀족들의 전유물로 화하다시피 되어 원잡극이 지녔던 진실되고 생동하던 맛은 완전히 사라진다. 태조의 제십칠자 주권을 비롯하여, 태조의 제오자인 아들인 주유돈 및 명초의 왕자일·곡자경·가중명·유태와, 약간 뒤의 왕구사·강해 등에 의하여 잡극의 명맥이 유지되게 된다.

가중십오성[價重十五城] 값어치가 열다섯 성보다 중함. ()나라가 화씨벽(和氏璧)을 가지게 되었는데, ()나라에서 성 열다섯 개와 교환하자고 제안한 일이 있다. <史記 卷81 廉頗藺相如列傳>

가중연성[價重連城] 값어치가 여러 성을 합한 만큼 중하다. 참고로, 연성벽(連城璧)은 값어치가 여러 고을과 바꿀 만한 벽옥(璧玉)으로 화씨벽(和氏璧)을 말한다. 전국 시대에 조()나라 혜문왕(惠文王)이 이것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나라 소왕(昭王)15개의 성읍과 맞바꾸자고 청한 데에서 유래하였다. 화씨벽은 춘추 시대 변화(卞和)가 형산(荊山)에서 발견한 박옥(璞玉)을 다듬어 얻은 벽옥으로 천하제일의 보배였다. <史記 卷81 廉頗藺相如列傳>

가즉불곡[歌則不哭] 사마광(司馬光)의 상()에 조문하는 일로 정자(程子)와 소식(蘇軾)이 벌인 논쟁에 관한 변론이다. 이날 조정에 경사가 있었는데, 관원들이 하례를 마치고 사마광의 상에 조문을 가고자 하였다. 이에 정자는 공자는 이날 곡하면 노래하지 않았다.[子於是日哭則不歌]’라는 말로 불가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그러자 좌객들이 공자는 곡한 날에 노래하지 않는다고 하였지, 노래한 날에 곡하지 않는다고는 말하지 않았다.[孔子言哭則不歌, 卽不言歌則不哭.]’라고 하면서 동의하지 않았으며, 소식은 이것은 시장에서 횡사한 숙손통(叔孫通)이 만든 예이다.’라고 말하면서 비웃었다. <宋史全文 卷13上 宋哲宗一>

가증[可憎] 밉살스럽다. 가증스럽다. 혐오스럽다.

가증[加增] 더하여 늘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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