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의삼책賈誼三策, 가의상소賈誼上疏, 가의승당상여입실賈誼升堂相如入室, 가의신서賈誼新書

가의삼책[賈誼三策] 한 문제(漢文帝) 때 장사왕 태부(長沙王太傅) 가의(賈誼)가 흉노의 변경 침입 및 제후의 발호로 인한 국가의 위기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상소를 올려 시무책(時務策)을 건의하였다. 그 상소에서 가의는 ()이 시국을 살펴보건대 통곡할 만한 것이 한 가지요, 눈물을 흘릴 만한 것이 두 가지요, 길게 탄식할 만한 것이 여섯 가지입니다.[臣竊惟事勢, 可為痛哭者一, 可為流涕者二, 可為長太息者六.]”라 하고 그에 대한 대책을 진언하였다. <漢書 卷48 賈誼傳>

가의상서[賈誼上書] 전한(前漢) 문제(文帝) 때 황제의 신임을 얻은 가의(賈誼)가 율령·관제·예악 등의 제도를 개정하기 위하여 많은 의견을 상주한 사실을 지칭한다. 한서(漢書) 22문제(文帝) 때 이르러 가의는……한나라가 세워져 지금까지 20여 년이 지났으니 마땅히 제도를 정하고 예약을 일으켜야 제후들이 이를 따르고 백성이 소박해 송사가 줄어들 것이라고 여겨 곧 이에 대한 의론의 초안을 올리니 천자가 기뻐하였다. 그러나 대신(大臣) 강관(絳灌) 등의 무리가 방해하였으므로 그의 의론은 마침내 실행되지 못하였다.[至文帝時賈誼以爲……漢興至今二十餘年 宜定制度興禮樂然後 諸侯軌道 百姓素樸 獄訟衰息 迺草具其儀 天子說焉 而大臣絳灌之屬害之 故其議遂寢]”라고 하였다.

가의상소[賈誼上疏] 가의(賈誼)는 한 문제(漢文帝) 때의 명신이다. 낙양(洛陽) 사람으로 시문에 뛰어나고 제자백가에 정통하였으며, 20세에 문제(文帝)에게 발탁되어 박사(博士)가 되었다가 태중대부(太中大夫)로 승진되었다. 정삭(正朔)과 복색(服色)을 고치고 법률을 제정하며 예악(禮樂)을 일으키려 하였으나, 주발(周勃) 등 당시 대신들의 반대로 장사왕(長沙王) 태부(太傅)로 좌천되었다가 4년 뒤에 문제(文帝)의 막내아들인 양회왕(梁懷王)의 태부(太傅)가 되었으나 왕이 낙마하여 급서하자, 죄책감과 함께 이를 애도한 나머지 33세의 젊은 나이로 병사하였다. 가의(賈誼)가 양회왕(梁懷王)의 태부(太傅)로 있으면서 세칭 가의상소(賈誼上疏)라고 하는 장편(長篇)의 상소문(上疏文)을 문제(文帝)에게 올렸다.

가의서[賈誼書] 가의(賈誼)가 지은 신서(新書)를 이른다.

가의승당 상여입실[賈誼升堂 相如入室] 양웅(揚雄)의 법언(法言: 양자법언揚子法言) 오자(吾子)시인(詩人)의 부()는 화려하면서도 법칙에 맞는데, 사인(詞人: 문장가文章家)의 부()는 화려하여 음탕하다. 만일 공구(孔丘: 孔子공자)의 문하에서 부()를 사용했다면, 가의(賈誼)는 당()에 올랐을 것이요, 사마상여(司馬相如)는 실()에 들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공자의 문하에서 부()를 사용하지 않은 것을 어쩌겠는가.[詩人之賦麗而則 詞人之賦麗而淫 如孔丘之門用賦也 則賈誼升堂 相如入室 其如不用何]”라고 하였다. 가의(賈誼)의 부()는 개인적인 불행과 울분을 토로하는 내용이 많기 때문에 승당(升堂)이라고 하였고, 그에 비해 사마상여(司馬相如)의 부()는 국가(國家)의 대사(大事)에 관계된 것이 많기 때문에 입실(入室)이라고 한 것이다. 승당(升堂)과 입실(入室)은 조예나 도달한 경지를 비유하는 말로, 논어(論語) 선진(先進)에 공자가 제자 자로(子路)의 경지를 두고 ()에는 올랐고 실()에는 아직 들어가지 못했다.[升堂矣 未入於室也]”라고 한 데에서 유래하였다.

가의신서[賈誼新書] 중국(中國) 한대(漢代)의 학자(學者) 가의(賈誼)의 저서(著書)이다. 신서(新書)로 약칭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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