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탄堪歎, 감탄고토甘呑苦吐, 감택甘澤, 감택闞澤, 감통感通, 감파堪破, 감포勘逋

감탄[堪歎] 한탄하여 마지않음. 백거이(白居易)의 우연(偶然) 시에는 초 회왕은 간사하고 영균은 곧았으니, 버림받음이 마땅한데 왜 그리 슬퍼했는고. 한 문제는 명성하고 가의는 어질었으니, 장사에 유배되어선 탄식할 만도 했네.[楚懷邪亂靈均直 放棄合宜何惻惻 漢文明聖賈生賢 謫向長沙堪歎息]”라고 하였다.

감탄고토[甘呑苦吐]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는 뜻으로, 사리(事理)의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자기 비위에 맞으면 취()하고 싫으면 버린다는 말이다. 개인적인 이익과 욕심을 위해서 믿음이나 의리는 상관하지 않고 필요할 땐 쓰고 그렇지 않을 땐 버리는 이기적인 사귐이나 야박한 세태와 인정의 간사함을 일컫는 말이다.

감택[坎宅] 북쪽 방위에 앉아서 대문이 남쪽을 향한 집을 이른다.

감택[甘澤] 감우(甘雨). 단비. 제때에 알맞게 오는 비. 감주(甘澍감패(甘霈).

감택[闞澤] 중국 삼국시대 오()나라의 학자이자 정치가로 경서와 역법에 대한 이해가 깊었다. 오왕(吳王) 손권(孫權)이 불러 벼슬을 주어 중서령(中書令)을 지냈으며, 도향후(都鄉侯)로 봉해졌다. 진수(陳壽)의 삼국지(三國志) 오서(吳書) 감택전(闞澤傳)감택의 자는 덕윤(德潤)이고 회계군(會稽郡) 산음(山陰) 사람이다. 집안 대대로 농민이었으므로 감택은 학문을 좋아하였으나 살림살이가 가난하고 자금이 없어, 늘 다른 사람을 위해 필경(筆耕)을 하여 종이와 붓의 비용을 제공받았는데, 베끼는 일을 마치고 나서는 또 그 전체를 외웠다. 그는 스승을 쫓아 토론하고 연구하였으며, 많은 서적을 두루 열람하고 아울러 역법과 천문에도 통달하여 이로 인해 명성이 드러났다. 감택은 효렴(孝廉)으로 천거되었고, 전당현(錢唐縣)의 장()으로 임명되었으며, 침현(郴縣)의 영()으로 승진하였다. 손권이 표기장군이 되었을 때 감택을 초빙하여 서조연(西曹掾)을 돕게 하였다. 손권이 황제로 일컬어진 뒤에는 감택을 상서(尚書)로 삼았다. 감택은 가화(嘉禾) 연간에 중서령(中書令)이 되고 시중(侍中)을 더하였다. 적오(赤烏) 5(242) 감택은 태자태부(太子太傅)로 제수되었으며, 전과 마찬가지로 중서령을 겸하였다.[闞澤字德潤, 會稽山陰人也. 家世農夫, 至澤好學, 居貧無資, 常為人傭書, 以供紙筆, 所寫旣畢, 誦讀亦遍. 追師論講, 究覽羣籍, 兼通歷數, 由是顯名. 察孝廉, 除錢唐長, 遷郴令. 孫權為驃騎將軍, 辟補西曹掾, 及稱尊號, 以澤為尚書. 嘉禾中, 為中書令, 加侍中. 赤烏五年, 拜太子太傅, 領中書如故.]”라고 하였다.

감택요[甘澤謠] 감택요는 당나라 때 원교(袁郊)가 지은 전기(傳奇) 소설이다. 만당의 전기(傳奇) 작가들은 개인의 전집을 많이 냈다. 우승유의 현괴록, 이부언의 속현괴록, 우숙의 기문, 배형의 전기, 설용약의 집이기, 원교의 감택요 등이 그 보기이다. 이 중에는 전기로서 좋은 작품도 들어 있긴 하지만, 대체로 다시 지괴화하고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감통[感通] 감통(感通)은 천하의 일에 감응하여 통함을 말한다. 주역(周易) 계사전 상(繫辭傳上)역은 생각함도 없고 작위함도 없어 고요히 움직이지 않다가, 감응하여 마침내 천하의 일에 통하게 된다.[易无思也, 无爲也, 寂然不動, 感而遂通天下之故.]”라고 하였다.

감통[感通] 허령(虛靈)한 자신의 마음으로 느껴 천하 만물의 이치를 통하는 것을 말한다. 주역(周易) 계사전(繫辭傳) ()조용히 움직이지 않고 있다가 감응하여 천하 모든 일에 마침내 통달하게 된다.[寂然不動 感而遂通天下之故]”라고 하였다.

감파[堪破] 사물의 진상을 확실하게 알아내다. 간파(看破).

감포[勘逋] 환곡(還穀)의 포흠(逋欠) 문제를 바로잡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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