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우駕牛, 가우지공嘉祐之功, 가우탁마嘉祐濯磨, 가욱賈郁, 가운로賈耘老, 가원복加元服
❍ 가우[駕牛] 관령(關令) 윤희(尹喜)가 누(樓)에 올라 사방을 바라보니, 동극(東極)에 붉은 기운이 서쪽으로 뻗쳐 있었다. 희가 말하기를 “아마 성인(聖人)이 경읍(京邑)을 지나갈 것이다.”라 하고, 재계하고 기다렸는데 그날 과연 노자(老子)가 청우(靑牛)를 타고 지나갔다 한다.
❍ 가우[嘉祐] 송 인종(宋仁宗)의 연호로 1056년부터 1063년까지이다.
❍ 가우다사구양공[嘉祐多士歐陽功] 가우(嘉祐) 연간에 많은 선비들이 등용되었던 것은 구양수의 공로임. 북송(北宋) 초기에는 아름다운 수사와 정연한 대구의 서곤체(西崑體)가 풍미하였는데, 당(唐)나라의 이상은(李商隱)을 전범으로 삼아, 험벽한 전고와 공교로운 표현에 힘을 기울였다. 화려하고 정교하기는 하였지만 점차 진솔한 감정은 결핍되었으며, 전고 인용에 급급하여 괴이하게 변하여 많은 비판을 받았다. 이러한 가운데 구양수(歐陽修)가 가우(嘉祐) 2년(1057)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고문을 제창하고 태학체(太學體)라 지칭되던 서곤체를 배척하자 문풍이 크게 변하였다.
❍ 가우도[駕牛島] 전남 강진(康津) 앞바다에 있는 작은 섬이다.
❍ 가우사[嘉祐寺] 소식(蘇軾)이 혜주(惠州)로 유배된 소성(紹聖) 원년(1094) 10월부터 전후 두 차례 약 1년 2개월 정도 기거했던 사찰이다. 소식(蘇軾)이 송 철종(宋哲宗) 원년에 혜주(惠州)에 이르러 합강루(合江樓)에 우거했다가 다시 가우사(嘉祐寺)로 옮긴 뒤에 또 재차 합강루로 돌아온 사연이 천거(遷居)라는 시의 자주(自註)에 보인다. <蘇東坡詩集 卷40>
❍ 가우지공[嘉祐之功] 구양수(歐陽脩)의 가우(嘉祐) 연간의 공적. 구양수(歐陽脩)가 1057년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소식(蘇軾), 소철(蘇轍) 형제와 왕안석(王安石), 증공(曾鞏) 등을 비롯한 많은 인재들을 발탁한 사실을 말한다.
❍ 가우지문[嘉祐之文] 가우(嘉祐)는 송 인종(宋仁宗)의 연호(1056~1063)로 이때 지어진 소씨(蘇氏) 3부자의 글을 함께 칭한 것이다.
❍ 가우탁마[嘉祐濯磨] 가우(嘉祐) 연간의 문풍쇄신(文風刷新). 가우는 송(宋)나라 인종(仁宗) 때의 연호이다. 문풍 쇄신이란 가우 원년(1056)에 구양수(歐陽脩)로 지공거(知貢擧)를 삼아 서곤체(西崑體)의 비루(卑陋)함을 청산시킨 것을 가리킨다. 이렇게 과거 문체를 혁신함으로써 송대(宋代)에 인재가 융성하게 된 계기를 삼았다고 한다.
❍ 가욱[賈郁] 오대(五代) 민(閩)나라 때 사람이다. 자는 정문(正文)이다. 벼슬은 선유주부(仙遊主簿)·선유령(仙遊令)을 지냈는데, 곧기로 유명하였다. <尙友錄 卷16>
❍ 가운로[賈耘老] 가수(賈收)로 운로(耘老)는 그의 자(字)이며, 오정(烏程: 지금의 절강성浙江省 호주湖州) 사람이다. 시(詩)에 능하고 술을 좋아했으나 집이 가난하였는데, 소식(蘇軾)이 호주(湖州)에 있을 적에 가까이 교유하였다. 시집으로 회소집(懷蘇集)이 있다.
❍ 가원복[加元服] 가관(加冠)의 뜻으로, 곧 가관례(加冠禮)를 가리킨다. 가관례란 남자가 20세에 관례(冠禮)를 행한다는 말로, 이 때문에 ‘관을 쓴다[加冠]’는 말은 만 20세, 곧 성년(成年)이 되었음을 나타낸다. 관례(冠禮)는 종묘(宗廟)에서 아버지가 주관하여 열리며, 이때 지정된 귀빈(貴賓)이 관례를 치르는 청년(青年)에게 관을 씌워준다. 후한서(後漢書) 안제기(安帝紀)에 “영초(永初) 3년의 춘정월(春正月) 경자일(庚子日)에 황제(皇帝)가 관례(冠禮)를 행하였다.”는 구절에 대한 이현(李賢) 주(注)에 “원복(元服)이란 관례(冠禮)를 말한다.”라고 하였다.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