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공姜公, 강공康功, 강공난명康公亂命, 강공보姜公輔, 강공저江公著, 강공전공康功田功

강공[康公] ()나라의 임금 강대(姜貸)로 강()은 시호이다. 평공(平公)의 손자이자 선공(宣公)의 아들이다. 재위 기간 동안 전씨(田氏)가 국정을 전단하였으며, 기원전 386년에 전화(田和)가 즉위하면서 그에 의해 바닷가로 쫓겨 갔다.

강공[姜公] 강태공(姜太公) 여상(呂尙)을 가리킨다. 그는 위수(渭水) 물가의 반계(磻溪)에서 낚시질하다가 문왕(文王)을 처음 만나 사부(師傅)로 추대되었고, 뒤에 문왕의 아들인 무왕(武王)을 도와서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천하를 평정하였다.

강공[康功] 사람을 편안히 하는 공으로 전공(田功)을 말한다. 주공(周公)이 성왕(成王)에게 훈계하기를 문왕께서는 허름한 옷을 입고 백성을 편히 해주는 일과 농사일을 하셨습니다.[文王卑服 卽康功田功]”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書經 無逸>

강공[康公] 중국 주()나라 문왕(文王)의 신하인 소 강공(召康公) ()을 말하는 것으로, 소 목공(召穆公)의 조상이다.

강공난명[康公亂命] 강공은 목공(穆公)의 아들로 목공이 죽을 때 유언하기를 자거씨(子車氏)의 세 아들[三良]을 나의 무덤에 순장(殉葬)하라.”고 하여 강공이 유언대로 하니, 나라 사람들이 세 어진 이의 죽음을 불쌍히 여겨 시를 읊었으니, 그것이 시경(詩經)의 황조(黃鳥) 편이다. 유언에는 치명(治命)과 난명(亂命)이 있으니, 치명은 정신이 있어서 바르게 시킨 것이고 난명은 정신이 착란하여 시킨 것이다.

강공보[姜公輔] ()나라 애주(愛州) 일남(日南) 사람이다. 진사에 급제한 후 교서랑(校書郞좌습유(左拾遺한림학사(翰林學士) 등을 역임하였다. 당 덕종(唐徳宗) 때 주도(朱滔)가 반역을 일으키면서 형인 주차(朱泚)에게 밀서를 보내자 강공보는 덕종에게 주차를 주살하라고 간하였으나 덕종은 따르지 않았다. 그 결과 경원(涇原)에서 병변이 일어나 장안이 혼란에 빠지자 봉상(鳳翔)으로 가려던 덕종에게 극력 간언하여 봉천(奉天)으로 몽진하게 하였다. 덕종 건중(建中) 4(783)에 간의대부(諫議大夫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가 되었다. 이듬해에 덕종의 딸 당안공주(唐安公主)의 장례 문제에 대해 간언하다가 덕종의 노여움을 사 태자좌서자(太子左庶子)로 강등되었다가 다시 천주(泉州) 별가(別駕)로 폄적되었다. 순종(順宗)이 즉위하고 나서 길주(吉州) 자사(刺史)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기 전에 죽었다. 당 헌종(唐憲宗) 때 예부(禮部) 상서(尙書)에 추증되었다.

강공저[江公著] 북송(北宋) 때 시인이자 관리로 자는 회숙(晦叔)이고 동려(桐廬: 현재의 저장성浙江省 동려현桐廬縣) 사람이다. 치평(治平) 4(1067)에 진사가 되었고, 낙양위(洛陽尉)로 있을 때 오랜 가뭄 끝에 비가 조금 내려서[久旱微雨詩]’라는 시로 사마광(司馬光)의 칭송을 들으면서 이름이 알려졌다. 거듭 승진하여 제점호남형옥(提點湖南刑獄)과 경서전운사(京西轉運使)에 올랐다. 원우(元祐) 6(1091)에 길주지주(吉州知州)로 부임할 때 소식(蘇軾)길주지주가 된 강공저를 보내며[送江公著知吉州]’라는 이별시를 지어 주었고, 건중정국(建中靖國) 원년(1101)에는 건주지주(虔州知州)로 있던 중에 해남(海南)에서 돌아오는 소식을 만나 시를 주고받았다.

강공전공[康功田功] 서경(書經) 무일(無逸)의 주공(周公)이 성왕(成王)에게 훈계하기를 문왕께서는 허름한 옷을 입고서 백성을 편안하게 길러주는 일과 농사일을 행하셨습니다.[文王 卑服 卽康功田功]”라고 한 말에서 나온 것이다.

강공헌[姜公獻] 공헌(公獻)은 강유(姜瑜)의 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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