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과剛果, 강관江關, 강관羌管, 강관講官, 강관絳灌, 강관등렬絳灌等列, 강관무문絳灌無文

강과[剛果] 굳세고 과단성이 있는 것을 가리킨다. 증공(曾鞏)의 상전정언서(上田正言書)간관은 굳세고 과단성이 있으며 뜨거나 가라앉음이 없다.[諫官剛果有氣節, 不浮沉.]”라고 하였다.

강관[絳灌] ()은 강후(絳侯) 주발(周勃), ()은 영음후(潁陰侯) 관영(灌嬰)을 이르는데 이들은 모두 한 고조(高祖)가 군대를 일으켜 천하를 평정할 때에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한나라의 개국 공신으로 두 사람이 합심하여 여씨(呂氏) 일족을 몰아내고 문제(文帝)를 옹립하여 한()나라 황실을 튼튼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가의(賈誼)20세 때 한 문제(漢文帝)의 부름을 받고 조정에 들어가 1년도 안 된 사이에 태중 대부(太中大夫)에 이르면서 예악(禮樂)에 입각한 문치(文治)의 정책을 과감하게 건의하자, 가의(賈誼)의 급진적인 개혁을 반대하고 시기하여 조정에서 쫓아냈던 대표적인 인물이다. 가의(賈誼)는 불과 스무 살의 어린 나이로 문제(文帝)의 깊은 신임을 얻어 태중대부(太中大夫)로 발탁되어 복색(服色), 제도(制度), 관명(官名) 등의 대대적인 개혁을 주장하다가 당시 대신이었던 주발·관영 등의 참소를 입었다. 그리하여 문제의 신임을 잃고 장사왕(長沙王)의 태부(太傅)로 좌천되어 서른셋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史記 絳侯周勃世家> <史記 灌嬰列傳> <漢書 卷48 賈誼傳> <史記 卷80 賈生列傳>

강관[羌管] 강적(羌笛). 고대 중국의 사천(四川) 지역에 사는 강족(羌族)에게서 유래된 관악기를 가리킨다. 이백(李白)의 청계반야문적(靑溪半夜聞笛)오랑캐 젓대로 매화인을 연주하네.[羌笛梅花引.]”라는 구절이 보인다.

강관[講貫] 경서(經書) 등의 책을 읽으며 그 뜻을 해석하고 내용을 익히는 일을 말한다.

강관[江關] 고대 관문(關門)의 이름이다. 전국시대 때 초()와 파()가 점유를 다툰 곳으로 현재의 사천성(四川省) 봉절현(奉節縣) 동쪽 장강(長江) 북안의 적갑산(赤甲山) 위에 있었다. 한관(扞關)이라고도 하였다. 큰 강물이 두 산 사이를 흐르며 형세가 극히 험준하여 사람이 접근하기 어렵다고 한다. <後漢書 岑彭傳>

강관[江關] 강관(江關)은 강가의 관문이란 의미로, 강가나 나루터 등의 의미로 쓰인다.

강관[江關] 강남(江南)과 같은 말이다. 남북조(南北朝) 후주(後周)의 유신(庾信)이 높은 관직에 있었으나 늘 향수(鄕愁)에 젖어 있다가 애강남부(哀江南賦)를 지었는데, 두보(杜甫)의 시 영회고적(詠懷古跡) 첫째 수(), 유신(庾信)이 애강남부(哀江南賦)를 읊은 것에 대해 유신은 평생 몹시 쓸쓸하더니, 늘그막에 시부가 강관을 진동했네.[庾信生平最蕭瑟 暮年詩賦動江關]”라고 하였다. 참고로 소식(蘇軾)의 시 과해득자유서(過海得子由書)문밖에는 해가 높이 떴고, 강관에는 가을에 낙엽이 진다.[門外三竿日 江關一葉秋]”라고 하였다.

강관[講官] 황제(皇帝)의 경연(經筵)에 진강(進講)을 담당하거나 태자궁(太子宮)에서 시강(侍講)하는 관원(官員)을 칭한다.

강관등렬[絳灌等列] 강관(絳灌)은 한() 나라의 개국공신인 강후(絳侯) 주발(周勃)과 의후(懿侯) 관영(灌嬰)의 합칭이다. 사기(史記) 92 회음후열전(淮陰侯列傳)회음후 한신(韓信)은 강후나 관영과 같은 반열에 서게 된 것을 수치스럽게 여겼다. 언젠가 한신이 장군 번쾌의 집에 들르자, 번쾌가 무릎 꿇고 절하면서 영송하였으며, 말끝마다 신하라고 칭하면서 대왕께서 신의 집에 영광스럽게 왕림해 주시다니요.’라고 하였다. 한신이 문을 나서며 쓴웃음을 지으면서 내가 살아서 그만 번쾌 따위와 한 줄에 서게 되다니.’라고 하였다.[羞與絳灌等列 信嘗過樊將軍噲 噲跪拜送迎 言稱臣 曰大王乃肯臨臣 信出門笑曰 生乃與噲等爲伍]”라는 말이 나온다.

강관무문[絳灌無文] 주발과 관영의 문장. ()나라 강후(絳侯) 주발(周勃)과 영음후(潁陰侯) 관영(灌嬰)은 모두 한 고조(漢高祖)를 도와 천하를 평정하였는데 공을 세워 제후에 봉해졌다. 두 사람은 포의(布衣)로 입신하여 촌스럽고 질박하며 학문이 부족하였다. 진서(晉書) 101 유원해재기(劉元海載記)()나라 수하(隨何)와 육가(陸賈)에게는 무용(武勇)이 없고, 강후 주발과 관영에게는 문학(文學)이 없다.[隨陸無武 絳灌無文]”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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