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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굉[姜肱] 후한(後漢) 때 사람으로 자는 백회(伯淮)이다. 두 아우 중해(仲海계강(季江)과 함께 모두 효행으로 알려졌다. 그 우애가 지극하여 항상 침식을 함께 하였다. 나라에서 태수로 삼아 불렀으나 숨어서 나가지 않고 집에서 생을 마쳤다. <後漢書 卷53 姜肱列傳> 이현(李賢)의 주()강굉의 형제가 이불을 함께 덮고 잤다.[姜肱共被]”라고 했는데, 후에 이로 인하여 강굉의 이불은 형제간의 우애를 가리키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강굉공피[姜肱共被] 형제간의 우애를 뜻한다. 강굉은 후한(後漢) 사람으로 자가 백회(伯淮)인데, 두 아우인 중해(仲海계강(季江)과 우애가 지극하여 항상 한 이불을 덮고 함께 잤으므로 강굉공피(姜肱共被)라는 고사가 생기게 되었고, 이로 인해 형제간의 우애가 지극한 고사의 전형으로 쓰이게 되었다. <後漢書 卷五十三 姜肱傳>

강굉동피[姜肱同被] 강굉(姜肱)은 후한(後漢)시대 팽성국(彭城國) 광척현(廣戚縣) 사람인데 집안이 대대로 이름난 집안이었다. 그는 아우인 중해(仲海)와 계강(季江)과 함께 효성이 지극해서 이름이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들 형제간의 우애도 매우 지극해서 언제나 함께 자고 함께 일어났다. 형제들이 각각 장가들고 나서도 차마 떠나지 못하였으나 사속(嗣續; 대를 이음)을 위하여 서로 번갈아 자기 방에 가 잠을 잤다. 강굉은 학문도 무척 박식해서 그를 찾아와 배우는 제자가 3천여 명이나 되었고, 그의 두 동생의 명성도 역시 그에 버금갔다. 강굉이 하루는 계강과 함께 들에 나갔다가 도적을 만나 도적이 형제를 죽이려 하였다. 그때 형제가 서로 자신이 죽기를 다투었다. 강굉(姜肱)이 말하기를, “아우는 나이가 어리고 부모가 사랑하시는 데다 또 장가도 못 들었으니, 원컨대 내가 스스로 죽어 아우를 살리고 싶다.”라고 하니, 계강이 말하기를, “형은 나이가 많고 덕이 높아 집안의 보배요 나라의 영걸(英傑)이다. 빌건대 내가 죽어서 형의 목숨을 대신하겠다.”라고 하였다. 이에 도적이 칼을 거두고 말하기를, “그대들은 어진 사람이거늘 우리가 불량(不良)하여 잘못을 범하였다.”하고, 형제를 다 놓아 주었다.

강굉피[姜肱被] 후한(後漢)의 강굉(姜肱)이 동생인 중해(仲海계강(季江)과 지극히 우애하며 늘 한 이불을 덮고 잤던 고사가 있다. <後漢書 姜肱傳>

강교[姜皎] 당 현종(唐玄宗) 때의 대신(大臣)이다. 진주(秦州) 상규(上邽) 사람이다. 무측천(武則天) 장안(長安: 701~704) 연간에 상의봉어(尙衣奉御)가 되었고, 현종(玄宗)이 즉위하자 전중소감(殿中少監)에 임명되었다. 두회정(竇懷貞)과 태평공주(太平公主) 등의 역란 모의를 진압할 때 현종을 도운 공으로 전중감(殿中監)에 임명되고 초국공(楚國公)에 봉해졌다. 얼마 뒤에 태상경(太常卿)이 되고 비서감(秘書監)을 겸하였다. 현종(玄宗) 개원(開元) 10(722)에 일에 연루되어 흠주(欽州)로 유배되어 가는 도중에 병사(病死)하였다.

강교[絳郊] ()은 진()나라의 수도(首都)이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노소공(魯昭公) 7년 전()가을에 진()나라 강도(絳都)의 교외(郊外)에 용()이 출현(出現)하였다.[秋龍見于絳郊]”는 내용에서 보인다.

강교[江郊] 강변의 들. 한양 도성 밖 한강가의 교외를 말한다.

강교노과다[講郊魯過多] () 나라는 제후국으로서 교제(郊祭)를 지낸 것은 잘못이라는 뜻이다. ()는 천자가 하늘에 제사하는 교제(郊祭)를 말하는데, 예기(禮記) 예운(禮運)에 공자가 , 슬프다. 내가 주나라의 도를 보니, 유왕(幽王)과 여왕(厲王)이 손상시켰다. 이러하니 노나라 말고 어디로 가겠는가. 그러나 노나라의 교제(郊祭)와 체제(禘祭)는 예가 아니니 주공(周公)의 가르침이 쇠하였도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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