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생賈生, 가생가곡嘉生嘉穀, 가생과진론賈生過秦論, 가생기복賈生忌鵩
❍ 가생[賈生] 가의(賈誼)를 가리킨다. 서한(西漢) 낙양(洛陽) 사람이다. 18세 때 시경(詩經)과 서경(書經)을 능히 외우고 문장을 잘 지어 재사(才士)로 이름났다. 그는 불과 스무 살의 어린 나이로 문제(文帝)의 신임을 얻어 태중대부(太中大夫)로 발탁되어 복색(服色), 제도(制度), 관명(官名) 등의 대대적인 개혁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당시 대신이었던 주발(周勃), 관영(灌嬰) 등에게 참소를 입어, 결국 문제의 신임을 잃고 장사왕(長沙王)의 태부(太傅)로 좌천되어 서른셋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진정사소(陳政事疏), 조굴원부(弔屈原賦) 등의 유명한 글이 있고, 신서(新書) 10권과 명대에 편집한 가장사집(賈長沙集)이 있다. <漢書 卷48 賈誼傳>
❍ 가생[賈生] 가의(賈誼)를 말한다. 기원전 200년에 태어나서 168년 33세의 나이로 요절한 하남성 낙양(洛陽) 출신의 서한 초기 문인에 학자이자 정치가이다. 장사왕(長沙王)의 태부를 지낸 까닭에 가태부(賈太傅), 가생(賈生), 가장사(賈長沙)라고도 부른다. 시문에 뛰어나고 제자백가의 설에 정통하여 한문제(漢文帝)의 총애를 받아 약관의 나이로 최연소 박사가 되었다. 1년 만에 다시 태중대부(太中大夫)가 되어 진(秦)나라 때부터 내려온 율령·관제·예악 등의 제도를 개정하고 전한의 관제를 정비하기 위한 많은 의견을 상주하였다. 그러나 주발(周勃) 등 당시 창업공신 출신의 고관들로부터 견제를 받아 장사왕(長沙王)의 태부(太傅)로 좌천되었다. 자신의 불우한 운명을 굴원(屈原)에 비유하여 복조부(鵩鳥賦)와 조굴원부(弔屈原賦)를 지었으며, 초사(楚辭)에 수록된 석서(惜誓)는 그의 작품으로 알려졌다. 4년 뒤 복귀하여 문제의 막내아들 양왕(梁王)의 태부가 되었으나 왕이 낙마하여 급서하자 상심한 나머지 1년 후인 기원전 33세의 나이로 죽었다. 저서에 신서(新書) 10권이 있으며, 진(秦)의 흥망성쇄를 논한 과진론(過秦論)은 유명하다. <史記 卷84 屈原賈生列傳>
❍ 가생[賈生] 가의(賈誼)를 가리킨다. 가의는 전한 때 낙양(洛陽) 사람으로 정위(廷尉) 오공(吳公)의 천거로 문제(文帝)의 부름을 받아 박사(博士)에 제수되고 황제의 신임을 받아 한 해 만에 태중대부(太中大夫)에 올랐다.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려 당시의 폐단을 논하다 주발(周勃)과 관영(灌嬰) 등의 비방을 받아 장사왕(長沙王)의 태부(太傅)로 쫓겨났다가 다시 돌아와 양회왕(梁懷王)의 태부로 임명되었다. 당시에 흉노가 변방을 침략하고 제후왕들이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이들을 제어할 방책으로 제후왕을 많이 봉하여 제후왕의 힘을 약화하고 흉노에 대한 강경책을 쓸 것을 건의하였다. 그는 상소에서 건의하는 내용을 통곡할 만한 일[可爲痛哭者] 한 가지, 눈물 흘릴 만한 일[可爲流涕者] 두 가지, 길게 탄식할 만한 일[可爲長太息者] 여섯 가지로 구분하여 아뢰었다. 그러나 이러한 건의는 문제의 소극적인 태도로 인해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였다. <漢書 卷48 賈誼傳>
❍ 가생[賈生] 한 문제(漢文帝) 6년에 흉노(匈奴)가 변경을 침략하고 회남왕(淮南王)과 제북왕(濟北王)이 역모로 죽음을 당하자, 가의가 문제에게 상소하여 당시의 사세(事勢)가 쌓아 놓은 땔나무 아래에 불을 안아다 놓은 형세라고 지적하면서 통곡할 만한 것이 한 가지이고, 눈물을 흘릴 만한 것이 두 가지이고, 길게 탄식할 만한 것이 여섯 가지라고 언급한 뒤 이것들에 대해 차례로 설명했다. <通鑑節要 卷7 漢紀 太宗孝文皇帝6>
❍ 가생가곡[嘉生嘉穀] 가생(嘉生)은 사람이 먹고 사는 좋은 곡물이 잘 생장(生長)는 것을 이른다. 고대에는 상서로움으로 여겼다. 전한서(前漢書) 권25 교사지(郊祀志)에 “백성과 신(神)이 각기 맡은 바의 직책이 있었는데, 백성이 맡은 바의 직책을 공경히 행하여 더럽히지 않았기 때문에 신이 가생(嘉生)을 내려주어 백성이 분수에 따라 차례로 펴서 재화가 이르지 않고 구하는 바에 부족함이 없었다.[民神異業, 敬而不黷, 故神降之嘉生, 民以物序, 災禍不至, 所求不匱.]”라고 보인다. 이는 본래 사기(史記) 권26 역서(曆書)에 “백성과 신이 각기 맡은 바의 직책이 있었는데, 백성이 맡은 바의 직책을 공경히 행하여 더럽히지 않았기 때문에 신이 가곡(嘉穀)을 내려주어 백성이 일을 순히 하여 복을 누려서 재화가 생기지 않고 구하는 바에 부족함이 없었다.[民神異業, 敬而不瀆, 故神降之嘉生, 民以物享, 災禍不生, 所求不匱.]”라고 한 데에서 나온 것으로, 사기집해(史記集解)와 사기색은(史記索隱)에서는 모두 “가생은 가곡이다.[嘉生, 嘉穀也.]”라고 한 응소(應劭)의 설을 취하고 있다.
❍ 가생가도[賈生賈島] 가생(賈生)은 한(漢) 나라 가의(賈誼)를 말하고 가도(賈島)는 당(唐) 나라 때 시인(詩人)인데, 처음에 중이 되었다가 뒤에 한유(韓愈)의 가르침을 받아 다시 환속(還俗)하였다. <唐書 卷一百七十六 賈島傳>
❍ 가생과진론[賈生過秦論] 가생(賈生)은 서한(西漢) 때의 문신이자 문인인 가의(賈誼)를 가리킨다. 과진론(過秦論)은 가의의 대표적인 산문으로, 그토록 막강하던 진(秦)나라가 쉽게 멸망할 수밖에 없었던 원인은 인의(仁義)를 베풀지 않았던 것이라고 하였는데, 그 내용 가운데 “감옥에 갇힌 자들을 풀어 주어 형벌을 면해 주고, 연좌(緣坐)시키는 나쁜 형벌을 제거하여 그들로 하여금 각자 고향으로 돌아가게 해야 한다. 곡식 창고를 열고 재화를 나누어 주어 곤궁한 선비를 구제해야 하며, 부세(賦稅)를 경감하고 요역(徭役)을 줄여 백성의 곤란함을 도와주어야 한다.”라고 하였다.
❍ 가생기복[賈生忌鵩] 가생은 전한(前漢) 때 가의(賈誼)를 가리킨다. 그는 장사왕(長沙王)의 태부(太傅)로 좌천되어 마음이 울적하고 지세(地勢)가 비습하여 건강도 나빴는데 상서롭지 못하다는 올빼미마저 날아들므로 복조부(鵩鳥賦)를 지어 자위하였다. <漢書 賈誼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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