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묘사당家廟祠堂, 가무경歌無競, 가무담석家無擔石, 가무입장안歌舞入長安

가묘[假廟] 주역(周易) 환괘(渙卦)와 췌괘(萃卦)의 괘사(卦辭)왕이 사당에 이른다.[王假有廟]”라고 하였다.

가묘[家廟] 한 집안의 사당(祠堂)으로 곧 신주를 모셔 놓은 집이다.

가묘사당[家廟祠堂] 가묘(家廟)는 조상을 제사 지내는 장소이다. 처음에는 관작이 있는 사람만이 건립할 수 있었는데, ()나라 때 처음으로 사묘(私廟)가 생겨났고 송()나라 때 이것을 가묘라고 부르게 되었다. 주희(朱熹)에 따르면, 이 가묘의 제도는 경()에 없을 뿐 아니라 당시 사서인(士庶人)들이 할 수 없는 것이 있으므로, 그 제도에 속례(俗禮)를 많이 사용하고 특별히 사당(祠堂)’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옛날의 묘()는 하나의 묘()에 하나의 신주만 모시게 되어 있어 각 묘마다 조묘(祖廟)나 예묘(禰廟)와 같은 이름이 있었으며, 그 숫자도 신분에 따라 천자는 7, 제후는 5묘 등으로 건립한 반면, 사당은 신주를 많이 모실 수 있다는 점에서 옛날의 묘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家禮 通禮 祠堂>

가무[歌舞] 노래 부르고 춤을 추는 것이다.

가무경[歌無競] 가무경은 시경(詩經) 집경(執競)에서 중국 주()나라 무왕(武王)의 공을 칭송하면서 강력하신 무왕이여. 비할 데 없는 공렬이시도다. 드러나지 않을까, 성왕·강왕이여. 상제가 인군으로 삼으셨도다.[執競武王, 無競維烈. 不顯成康, 上帝是皇.]”라고 한 데서 나온 표현이다.

가무담석[家無擔石] ()은 한 항아리, ()은 두 항아리라는 뜻으로 집에 모아 놓은 재산이 조금도 없음. , 집에 재물(財物)의 여유(餘裕)가 조금도 없음을 이른다.

가무담석[家無儋石] 집이 가난하여 식량이 아주 적은 것을 가리킨다. 남사(南史)유의는 집이 가난하여 먹을 것이 없었지만 노름에서는 한 판에 백만 섬을 걸었다.[劉毅家無儋石之儲, 樗蒱一擲百萬.]”라고 하였다. ()은 한 섬, ()은 두 섬을 의미한다.

가무음곡[歌舞音曲] 노래와 춤과 음악(音樂)을 이른다.

가무이주[家無二主] 한 집안에 주인(主人)이 둘이 있을 수 없다는 뜻으로, 군신(君臣)의 다름을 이르는 말이다.

가무입장안[歌舞入長安] 낙빈왕(駱賓王)이 군중(軍中)에서 성루(城樓)에 올라 지은 재군등성루(在軍登城樓) 시에 성 위엔 바람의 위세가 싸늘하고, 강 속엔 물 기운이 차가워라. 이 전란을 어느 날에 평정하고서, 노래하고 춤추며 장안에 들어갈까.[城上風威冷 江中水氣寒 戎衣何日定 歌舞入長安]”라고 하였다. 전당시(全唐詩) 79실려 있다.

가무희[歌舞戱] 당나라 때의 희극은 가무희(歌舞戱)와 과백희(科白戱)로 나눌 수 있으며, 특히 현종이 가무희를 좋아하여 자연스럽게 발전하였다. 단안절(段安節)의 악부잡록(樂府雜錄)을 보면, 당시의 가무 활동이 매우 성행하였음을 엿볼 수 있는데 아악부, 윤소악, 청약부, 고취부, 구나, 웅비부, 고가부, 구자부, 무공 등으로 분류하여 설명하고 있다. 이 중에서 특히 주목할 가치가 있는 것은 고가부이다. 그것은 당나라 때의 악무, 백희를 관장하던 기구로 적, 박판, 답고, 양장고 등을 사용하여 대면, 소중랑, 발두, 답요랑 등의 가무희를 연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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