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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건[葛巾] 갈건은 갈포로 만든 두건이다. 도잠(陶潛)의 음주(飮酒)만일 다시 유쾌히 마시지 않는다면, 공연히 두상의 건을 저버리게 되리라.[若復不快飮, 空負頭上巾.]”라고 하였는데, 도잠은 항상 갈건(葛巾)을 쓰고 다니다가 술을 만나면 즉시 갈건을 벗어서 술을 걸러 마시고는 다시 그 갈건을 쓰곤 했고 한다.

갈건[葛巾] 갈포로 만든 두건으로, 처사(處士) 곧 은사(隱士)가 쓰는 것이다. 이백(李白)이 도잠(陶潛)을 묘사한 희증정율양(戱贈鄭溧陽) 시에 도령은 날마다 취하여, 다섯 그루 버들에 봄이 온 것도 몰랐네. 소박한 거문고는 본래 줄이 없었고, 술을 거르는 덴 갈건을 사용했네. 맑은 바람 불어오는 북창 아래서, 스스로 희황상인이라 일컬었지. 그 언제나 율리에 가서, 평생의 친구를 한번 만나 볼거나.[陶令日日醉 不知五柳春 素琴本無絃 漉酒用葛巾 淸風北窓下 自謂羲皇人 何時到栗里 一見平生親]”라고 하였다.

갈건귀거주영준[葛巾歸去酒盈樽] 갈건은 본디 은자(隱者)의 두건(頭巾)인데, 도잠은 항상 갈건을 쓰고 야복(野服)을 입은 채로 신선처럼 담박한 생활을 했고, 때로는 갈건으로 술을 걸러 마시기도 했다. 또 일찍이 팽택 령(彭澤令)이 된 지 겨우 80여 일 만에 마침 군()의 독우(督郵)가 순시(巡視)하러 나온다는 말을 듣고는, 의관(衣冠)을 갖추고 독우를 뵈어야 한다는 아전의 말에 도잠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오두미(五斗米)의 하찮은 녹봉 때문에 허리를 굽혀 향리(鄕里)의 소인을 섬길 수 없다.” 하고, 마침내 팽택 령의 인끈을 풀어 던지고 즉시 떠나면서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지어 자신의 뜻을 피력했다. 그 귀거래사에 삼경은 묵었으나, 송국은 남아 있도다. 어린애를 이끌고 방으로 들어가니, 술이 동이에 가득하도다.[三徑就荒 松菊猶存 携幼入室 有酒盈樽]”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晉書 卷94 陶潛傳>

갈건시[葛巾釃] 갈건(葛巾)으로 술을 거른다는 것은 곧 동진(東晉)의 처사(處士) 도잠(陶潛)이 술을 매우 즐겼던 나머지, 항상 갈건을 쓰고 다니다가, 집에 빚어 놓은 술이 익기만 하면 그 즉시 갈건을 벗어서 술을 걸러 마시고는 다시 그 갈건을 쓰곤 했던 데서 온 말이다. <宋書 卷93 隱逸列傳 陶潛>

갈건야복[葛巾野服] 은사(隱士)의 두건과 옷. 갈건과 베옷이라는 뜻으로, 처사(處士)나 은사(隱士)의 거칠고 소박한 의관을 이른다.

갈건옹[葛巾翁] ()나라 도잠(陶潛)을 가리킨다. 그는 술이 익을 때면 갈건(葛巾)으로 술을 거르고 나서 다시 머리에 썼다고 한다. <宋書 卷93 隱逸列傳 陶潛> 또 그가 지은 오류선생전(五柳先生傳)집 옆에 버드나무 다섯 그루가 있기에 이를 나 자신의 호로 삼았다.[宅邊有五柳樹, 因以爲號焉.]”라는 말이 나온다.

갈건자[葛巾子] 갈건자는 도잠(陶潛)을 말한다. 송서(宋書) 93 은일열전(隱逸列傳) 도잠에 도잠은 술이 다 익으면 머리 위에 쓴 갈건을 가지고 술을 거른 뒤에 도로 다시 머리에 썼다.”라고 하였다.

갈건통음[葛巾痛飮] () 나라 때 도잠(陶潛)이 항상 갈건을 쓰고 다니면서, 술이 다 되었으면 이 갈건을 벗어서 술을 걸러 마시곤 했다는 데서 온 말이다.

갈건한대북창면[葛巾閑對北窓眠] 갈건 쓰고 한가로이 북창 아래 잠들다. 도연명(陶淵明)의 여자엄등소(與子儼等疏)오뉴월 중에 북창 아래에 누워 있으면 서늘한 바람이 이따금씩 스쳐 지나가곤 하는데, 그럴 때면 내가 태곳적 희황(羲皇) 시대의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五六月中 北窓下臥 遇凉風暫至 自謂是羲皇上人]”라고 하였다.

갈계역[葛溪驛] 강서성(江西省) 익양현(弋陽縣)의 역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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