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의과상위부이조굴원賈誼過湘爲賦以弔屈原, 가의과진賈誼過秦, 가의류체이賈誼流涕二

가의과상 위부이조굴원[賈誼過湘 爲賦以弔屈原] 가의(賈誼)가 상강(湘江)을 지나다가 부()를 지어서 굴원(屈原)을 조문함. 한 문제(文帝)의 총애를 받던 가의(賈誼)는 개혁정책을 추진하다가 주발(周勃)과 관영(灌嬰) 등 당시 대신들의 반대에 부딪혀 장사왕태부(長沙王太傅)로 좌천되었다. 부임하러 가는 길에 상강(湘江)을 건너다가 한 편의 부()를 지어 굴원(屈原)을 조문하고 자신의 처지를 가탁하여 속세를 떠날 뜻을 은연중에 내비쳤으니, 이 글이 조굴원부(弔屈原賦)이다. 가의(賈誼)는 다시 문제(文帝)의 부름을 받아 선실(宣室)에서 알현하고 귀신의 근본에 대해 소상하게 설명하니, 문제(文帝)가 감탄하고 평소 학문을 좋아하는 둘째 아들 양회왕(梁懷王)의 태부(太傅)로 삼았다. 그러나 몇 년 뒤에 양회왕(梁懷王)이 말을 타다가 떨어져 죽자, 왕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스스로의 잘못이라고 자책하다가 33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史記 屈原賈生列傳>

가의과진[賈誼過秦] 가의(賈誼)는 서한(西漢: 전한前漢) 때 낙양(洛陽) 사람으로 시문에 뛰어나고 제자백가에 정통하였다. 과진(過秦)은 가의(賈誼)가 지은 과진론(過秦論)을 이르는데 진()나라의 잘못을 지적한 내용이다. 이 글에서 가의(賈誼)는 진()나라가 관중(關中)의 요새를 점거하여 6국을 제압하고 천하를 통일하였는데, 이세황제(二世皇帝) 때에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 결국은 망하였음을 열거하고, 말미에 ()나라가 구구한 한 주()의 땅을 가지고 만승(萬乘)의 권세를 얻어 8개 주()를 점령하고 동렬(同列)들에게 조회받은 지가 백여 년이나 되었다. 그런 뒤에 육합(六合)을 자기 집으로 삼고 효산(殽山)과 함곡관(函谷關)을 궁궐(宮闕)로 삼았으나, 일개 필부(匹夫)인 진승(陳勝)이 난을 일으키자, 칠묘(七廟)가 무너지고 군주가 남의 손에 죽어서 천하의 웃음거리가 된 것은 어째서인가? 인의(仁義)를 베풀지 않아서였고, 공격과 수비의 형세가 다르기 때문이었다.[秦以區區之地 致萬乘之權 招八州而朝同列 百有餘年矣 然後以六合爲家 崤函爲宮 一夫作難 而七廟墮 身死人手 爲天下笑者 何也 仁誼不施 而攻守之勢異也]”라고 하였다. 중국은 통상 기주(冀州), 연주(兗州), 청주(青州), 서주(徐州), 양주(揚州), 형주(荊州), 예주(豫州), 양주(梁州), 옹주(雍州)9()로 표현하는데, ()나라는 옹주(雍州) 지역에 해당된다. 칠묘(七廟)는 천자의 종묘(宗廟)는 일곱 개이므로 이렇게 말한 것인데, 이 글은 고문진보(古文眞寶)에도 실려 있다.

가의류체이[賈誼流涕二] 가의가 한() 나라 양태부(梁太傅)로 있을 때 상소(上疏)하기를 삼가 현재의 상황을 살펴보건대, 통곡할 만한 일이 한 가지요, 눈물을 흘릴 만한 일이 두 가지요, 장탄식할 만한 일이 여섯 가지입니다.[竊惟事勢 可爲痛哭者一 可爲流涕者二 可爲長太息者六]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시정(時政)이 걱정스러운 것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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