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부葭莩, 가부賈傅, 가부家父, 가부假父, 가부柯斧, 가부賈父
❍ 가부[家父] 남에게 살아 계신 자기(自己)의 아버지를 이르는 말. 남에게 대(對)하여 자기(自己)의 남편(男便)을 이르는 말. 고대(古代) 로마에서 가장권(家長權)의 주체(主體)가 된 사람. 반드시 아버지만은 아니며 가족(家族)에 대(對)해서 절대적(絶對的)인 권력(權力)을 가졌음.
❍ 가부[假父] 양부(養父). 의부(義父), 의붓아비를 일컫는 말이다.
❍ 가부[加賦] 정기 세금 외에 더 거두어들이는 부세이다. 임진왜란 때 군사들의 식료(食料)를 위해 1~2말을 더 거두고 삼수량(三手粮)이라 하니 이것이 바로 가부였다.
❍ 가부[葭莩] 가(葭)는 갈대이고 부(莩)는 갈대 줄기 속에 있는 얇은 막으로, 전하여 가부의 친척[葭莩之親]이란 촌수(寸數)가 먼 친인척(親姻戚), 소원한 친척 또는 소원한 교의(交誼), 친척관계가 아주 소원하거나 무덤덤함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 가부[葭莩] 가부는 친함이 박한 것을 비유한 것인데, 후세에는 척의(戚誼)가 있음을 표현하는 말로 쓰였다. 한서(漢書) 권53 중산정왕전(中山靖王傳)에 “지금 군신(群臣)과는 가부의 척분이 있지 않다.[今群臣非有葭莩之親]”라고 하였는데, 그 주(注)에 “가(葭)는 갈대요, 부(莩)는 갈대 대롱 속에 있는 지극히 엷은 흰 껍질이니 아주 얇고 가벼운 것을 뜻한다.[葭, 蘆也, 莩者, 其中白皮至薄者也.]”라고 하였다.
❍ 가부[可不] 물론이다. 그렇다. 어찌 ~이 아니겠는가. ~으로 되지 않는가.
❍ 가부[柯斧] 법규. 시경(詩經) 빈풍(豳風) 벌가(伐柯)에 “도끼자루를 베네 도끼자루를 베네, 그 법칙이 멀리 있지 않구나.[伐柯伐柯, 其則不遠]”라고 하였는데, 정현(鄭玄)의 주(注)에 “칙(則)은 법이다. 도끼자루를 잡고서 나무를 베는데, 장차 자루를 가깝게 하여서 자루로서 자의 재는 법을 삼아야 한다. 이러한 법은 사람에게서 멀지 않은데 사람이 오히려 그 법도를 멀리하나, 도를 실천하는데 멀리 할 수 없음이 명확하다는 말이다.[則, 法也. 言持柯以伐木, 將以為柯近, 以柯為尺寸之法, 此法不遠人, 人尚遠之, 明為道不可以遠.]”라고 하였다.
❍ 가부[跏趺] 가부(跏趺)하여 앉는 것은 불가(佛家)에서 앉는 한 가지 자세이니, 넓적다리에 두 발을 좌우로 교차하여 올려놓고 앉는 것으로 참선할 때 앉는 방법 중 한 가지다.
❍ 가부[賈父] 가부는 후한(後漢)의 가표(賈彪)를 이른다. 가표가 신식(新息)의 수령이 되었을 적에, 빈곤한 백성들이 자식을 낳아 기르지 못하고 내버려서 인구가 감소하자, 영아를 유기할 경우에 살인죄를 적용하도록 엄하게 법령을 정하였다. 그 결과 몇 년 사이에 기르는 아이들이 1000명에 이르렀는데, 모두 “이는 가부(賈父)가 낳은(살려 준) 것이다.[賈父之所生也]”라고 하여, 아들을 낳으면 가자(賈子)라고 하고 딸을 낳으면 가녀(賈女)라고 불렀다 한다. <後漢書 卷67 賈彪列傳>
❍ 가부[賈傅] 한 문제(漢文帝) 때 장사왕(長沙王)의 태부(太傅)를 지낸 가의(賈誼)를 가리키는데, 그가 일찍이 시국광구책(時局匡救策)인 치안책(治安策)을 문제에게 올렸는바, 그 첫머리에 “신은 그윽이 생각하건대, 지금의 사세가 통곡할 만한 일이 한 가지요, 눈물을 흘릴 만한 일이 두 가지요, 길이 한숨을 쉴 만한 일이 여섯 가지입니다.[臣竊惟事勢 可爲痛哭者一 可爲流涕者二 可爲長太息者六]”라고 하였다. <漢書 卷48 賈誼傳>
❍ 가부[賈傅] 가부는 전한(前漢) 장사왕(長沙王)의 태부(太傅)를 지낸 가의(賈誼)이다. 가의가 문제(文帝)의 부름을 받아 20세에 박사(博士)를 거쳐 중대부(中大夫)까지 되었다가 대신의 시기로 장사왕의 태부로 쫓겨난 뒤, 조굴원부(弔屈原賦)를 지어 굴원을 조상하는 동시에 자신을 그에 비유하였다. 스스로 상심하여 33세의 나이로 죽었다. <史記 卷84 賈生列傳>
❍ 가부[賈傅] 서한(西漢) 때의 문학가 가의(賈誼)를 가리킨다. 장사왕(長史王) 태부(太傅)를 지냈기 때문에 생긴 호칭이다. 가의가 소년 때 제가(諸家)의 글에 통달하였는데, 문제(文帝)가 그를 불러 박사(博士)로 삼았다가 태중대부(太中大夫)로 승진시켰다. 가의가 정삭(正朔)을 개정하고 복색을 변경하고 법도를 제정하고 예악을 일으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 자주 상소를 올려 정사에 대해 말하면서 당시의 폐단을 지적하자 대신이 미워하여 장사왕(長沙王) 태부(太傅)로 내보냈다. 이윽고 양 회왕(梁懷王)의 태부로 옮겼다가 33세에 죽었는데, 세상에서 그를 가태부(賈太傅)라고도 하고 가생(賈生)이라고도 한다. <史記 卷84 賈生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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