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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재[艮齋] 남송(南宋) 때 영가학파(永嘉學派)를 창시한 철학가 설계선(薛季宣)의 호로, 자는 사룡(士龍)이고 온주(溫州) 영가(永嘉) 사람이다. 저서로 낭어집(浪語集), 서고문훈(書古文訓) 등이 있다.

간재[簡齋] 간재는 송()나라의 명신이며 북송(北宋)의 시인인 진여의(陳與義)의 호로, 자는 거비(去非)이다. 진여의는 북송 말기에 일찍이 태학박사(太學博士) 등을 역임했는데, 금인(金人)이 북송의 도읍지인 변경(汴京)을 침입함으로 인해 흠종(欽宗)의 아우 고종(高宗)이 강남(江南)으로 파천함에 이르러, 그는 양양(襄陽), 한양(漢陽) 등지로 피란하여 동정호(洞庭湖), 상강(湘江), 오령(五嶺) 등지를 전전하며 지내다가, 남송(南宋) 고종(高宗) 부름을 받고 남송으로 가서 한림학사(翰林學士), 지제고(知製誥) 등을 거쳐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이르렀다. 난세에 강남(江南) 각지를 방랑한 체험이 비슷했던 두보를 특히 좋아했으며, 우국탄식의 사()를 많이 지었다. 소박하고 순진한 서정·서경(敍景)의 시를 주로 썼으며, 특히 풍경에 감정을 이입(移入)하는 서정성은 당시풍(唐詩風)으로의 회귀를 나타낸다. 정강(靖康)의 난 이후에 북송시인(北宋詩人)이 모두 없어지고 오직 간재만이 남았는데, 그 시재가 탁월하고 변화에 능했다 한다. 진여의의 시는 방회(方回)가 편찬한 시선집인 영규율수(瀛奎律髓) 17 청우류(晴雨類)에도 수록되어 있는데, 그는 두보와 황정견(黃庭堅), 진사도(陳師道), 진여의를 강서시파(江西詩派)의 일조삼종(一祖三宗)이라 불렀다. 저술에 간재집(簡齋集)이 있다.

간재노인[簡齋老人] 남송의 시인 진여의(陳與義)를 말한다. 그의 호가 간재(簡齋)이다. 하남성(河南省) 낙양 사람으로 태학박사와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지냈으며, 두보(杜甫)의 시풍을 따르고 황정견(黃庭堅), 진사도(陳師道) 등과 더불어 강서시파(江西詩派)의 일원이었다. 저서로 간재집(簡齋集)이 전한다.

간재우청[簡齋雨晴] 간재(簡齋)의 우청(雨晴) ()를 이른다. 간재는 남송(南宋) 진여의(陳與義)의 호로, 자는 거비(去非)이고, 낙양(洛陽) 사람이다. 진여의의 시는 간재집(簡齋集) 11에 수록되어 있다. 그 시에 서남쪽에 하늘 뚫렸다가 강물 다시 맑아지니, 구름 한 점 움직이지 않고 작은 여울 가로지르네. 담장 위에 지저귀는 까치 깃털 여전히 축축하고, 누대 너머 남은 우레 아직 잦아들지 않는구나. 청량한 날씨 만끽하며 단잠을 즐기다가, 좋은 시구 급히 찾아 싱그러운 풍광을 노래하네. 이 밤의 아름다움 함께할 이 없는데, 누워 바라보는 은하수는 참으로 밝디밝구나.[天缺西南江面淸, 纖雲不動小灘橫. 牆頭語鵲衣猶濕, 樓外殘雷氣未平. 盡取微凉供穩睡, 急搜奇句報新晴. 今宵絶勝無人共, 臥看星河盡意明.]”라고 하여, 비가 막 갠 때의 풍광을 노래하였다. 진여의의 시는 방회(方回)가 편찬한 시선집인 영규율수(瀛奎律髓) 17 청우류(晴雨類)에도 수록되어 있는데, 그는 두보와 황정견(黃庭堅), 진사도(陳師道), 진여의를 강서시파(江西詩派)의 일조삼종(一祖三宗)이라 불렀다.

간재제심[簡在帝心] ()나라 탕왕(湯王)나 소자(小子) ()는 검은 희생을 써서 감히 거룩하신 상제(上帝)께 아룁니다. 죄가 있는 사람을 제가 감히 용서하지 못하며, 상제(上帝)의 신하를 제가 감히 엄폐하여 등용하지 않지 못하여, 신하를 간택함이 상제의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予小子履 敢用玄牡 敢昭告于皇皇后帝 有罪不敢赦 帝臣不蔽 簡在帝心]”라고 하였다. <論語 堯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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