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맹어호苛政猛於虎, 가정미加定米, 가정적柯亭笛, 가정연柯亭椽, 가정죽柯亭竹

가정맹어호[苛政猛於虎] 가혹(苛酷)한 정치(政治)는 호랑이 보다 더 사납다. , 가혹한 정치(과중한 세금과 강제 노역 등)로 말미암아 백성에게 미치는 해는 범의 해보다 맹렬함을 뜻한다. 공자가 제자들과 태산(泰山)을 지나가다가 어떤 아낙네가 묘() 옆에서 통곡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자로(子路)를 시켜 어찌 된 영문인지 물었더니, 예전에 이곳에서 저의 시아버지와 남편이 호랑이에게 물려 돌아가셨는데, 이번에 자식이 물려 죽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왜 이곳을 떠나지 않느냐고 반문하자, 여인이 대답하기를 이곳은 가혹한 세금이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공자가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기억해 두어라. 가혹한 정사는 맹호보다도 사나운 것이니라.[小子聽之 苛政猛於虎]”라고 탄식하였다는 기록이 예기(禮記) 단궁 하(檀弓下)에 보인다.

가정문견기[嘉靖聞見紀] 명나라 심월(沈越)이 찬술한 가융양조문견기(嘉隆兩朝聞見紀)를 가리킨다. 명 세종 즉위년인 정덕(正德) 16(1521)부터 융경(隆慶) 6(1572) 목종이 죽을 때까지의 정치를 차례대로 모아 만든 책이다.

가정미[加定米] 일정한 세율에 의하여 부과 징수하는 조세 이외에 별도로 징수하는 미곡(米穀)을 말한다.

가정연[柯亭椽] 복도(伏滔)의 장적부서(長笛賦序)채옹(蔡邕)이 가정관(柯亭館)에서 자는데, 그 집은 대나무로 서까래를 하였다. 그는 그 서까래를 쳐다보고 좋은 대나무다.’라 하고서, 가져다 피리를 만들었다.[初邕避難江南 宿于柯亭 柯亭之觀 以竹爲椽 邕仰而眄之曰 良竹也 取以爲笛]라고 하였다.

가정적[柯亭笛] 가정(柯亭)은 절강성(浙江省) 소흥현(紹興縣) 서남쪽에 있는 정자 이름인데, 후한(後漢) 때의 문인 채옹(蔡邕)이 일찍이 회계(會稽)로 피난을 가던 도중 가정에서 묵다가, 그 정자의 서까래로 얹은 대나무에서 뛰어난 소리가 날 것을 알고는 이것으로 젓대를 만들었더니, 천하의 보기(寶器)가 되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가정적[柯亭笛] 가정(柯亭)의 피리. 가정은 절강성(浙江省) 소흥(紹興)에 있는 지명(地名)으로, 이곳에서 나는 대나무는 질이 아주 좋은데, 한 나라의 채옹(蔡邕)이 일찍이 회계(會稽) 가정(柯亭)을 지나면서 집 동쪽 십육연(十六椽)의 대를 보고서 취하여 젓대를 만들었는데 과연 기이한 소리가 났다. 그 뒤에 진()나라 환이(桓伊)가 얻어 항상 자신이 보존하고 불었다고 한다. 후대에는 좋은 젓대를 형용하는 말로 쓰였다. <會稽記><通考>

가정죽[柯亭竹] 군방보(群芳譜)가정죽은 운몽의 남쪽에서 나는 대로 피리를 만들 만한데, 715일 이전에 난 것을 다음 해 715일 이전에 베어서 만들어야 하는바, 기한이 지나면 소리가 막히고, 기한에 못 미치면 소리가 뜬다.[柯亭竹生雲夢之南 可爲管 以七月望前生 明年七月望前伐 過期則音滯 未期則音浮]”라고 하였다. 또 진()나라 복도(伏滔)의 장적부서(長笛賦序)처음에 채옹이 강남으로 피난하여 가정에서 자는데, 가정의 누관 건물에 대로 서까래를 얹었던바, 채옹이 그것을 쳐다보고는 좋은 대라고 말하고 그것을 취하여 젓대를 만들었는데, 뛰어난 소리가 유독 절묘하여 역대로 전해 와서 지금에 이르렀다.[初邕避難江南 宿于柯亭 柯亭之觀 以竹爲椽 邕仰而眄之曰 良竹也 取以爲笛 奇聲獨絶 歷代傳之 以至于今]”라고 하였다. <藝文類聚 卷89 本部 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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