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선脚船, 각선却扇, 각선구검刻船求劍, 각설却說, 각성覺醒, 각성覺性
❍ 각선[脚船] 사자(使者)가 승선(乘船)한 배로부터 육지에 오르거나 승선할 때에 옮겨 타는 배이다. 견선(遣船)과 같이 연례송사(年例送使)에는 허락되지 않았다.
❍ 각선[却扇] 혼례를 의미한다. 고대(古代)에 혼례를 행할 때 신부가 부채로 얼굴을 가리다가 맞절을 한 이후에 부채를 물리치는 것을 말한다. 북주(北周) 유신(庾信)의 위량상황후세자여부서(爲梁上黃侯世子與婦書)에 “휘장 안에서 술잔을 나누고, 침상 앞에서 부채를 물리친다.[分杯帳裏 却扇牀前]”라는 구절에서 나온 말이다.
❍ 각선[郄詵] 극선(郤詵). 진(晉) 각선이 현량대책(賢良對策)으로 천하제일이었다. 진(晉)나라 극선(郤詵)이 천하제일의 대책문으로 과거에 급제한 뒤에 “계수나무 숲 속의 한 가지요, 곤륜산의 한 조각 옥돌이다.[桂林之一枝 崑山之片玉]”라고 자칭하였다. <晉書 卷52 郤詵列傳>
❍ 각선구검[刻船求劍] 각주구검(刻舟求劍). 칼을 강물에 떨어뜨리자 뱃전에 그 자리를 표시(表示)했다가 나중에 그 칼을 찾으려 한다는 뜻으로, 판단력(判斷力)이 둔하여 융통성이 없고 세상일(世上-)에 어둡고 어리석다는 뜻이다.
❍ 각설[却說] 고전 소설에서 이야기를 전환할 때 쓰는 용어. 화제를 돌리어 딴 말을 꺼낼 때 그 첫머리에 쓰는 말이다. 차설(且說).
❍ 각성[覺醒] 정신을 차리고 주의 깊게 살피어 경계하는 태도. 깨어 정신을 차림. 어떤 잘못이나 사실 등을 깨달아 앎. 불지론(佛地論)에 이르기를 “각(覺)은 일체의 지혜를 깨닫는 것이니, 뒤에 정(情)이 있는 사람들을 개오(開悟)하고 각성(覺醒)하기를 마치 꿈을 깨는 것과 같이 하였으므로 불(佛)이라 이름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이르기를 “불(佛)이라는 것은 한어(漢語)로 깨닫는다는 뜻이니, 장차 중생(衆生)들을 깨우치고자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참고로 보요경(普曜經)에 이르기를 “부처(석가모니釋迦牟尼)는 두솔천(兜率天)에서 서역(西域)의 가유국(迦維國) 정반왕(淨飯王) 궁중(宮中)으로 신(神)을 내려 보내 마야부인(摩耶夫人)의 배에 잉태되었다가 오른쪽 옆구리를 찢고 탄생했다.”고 하였다.
❍ 각성[角星] 28수 가운데 동방창룡칠수(東方蒼龍七宿)의 하나인 각수(角宿)에 딸린 별자리. 천문유초(天文類抄)에는 각(角)은 “만물의 조화를 주관하고 임금의 위엄과 신임을 펼친다.……밝으면 나라가 태평하고 망각(芒角)이 생기고 흔들리면 나라가 평안하지 못하다.”라고 하였다.
❍ 각성[角聲] 뿔로 만든 피리 소리. 군중(軍中)에서 사용하는 악기인 각(角)을 부는 소리.
❍ 각성[角聲] 오음(五音)의 하나이다. 빠르고도 맑다. 그 성질이 꼿꼿하고, 그 소리[木聲]는 닭이 나무에서 우는 것 같고 용(湧)을 주장한다. 각은 잘 부딪쳐 부리기 어려우니, 백성의 상(象)이다. <樂學軌範 卷1 五聲圖說>
❍ 각성[覺性] 조선 시대 보은 출신의 승려로, 자는 징원(澄圓)이고 호는 벽암(碧巖)이며 속성은 김씨(金氏)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승군(僧軍)을 이끌었으며, 남한산성을 완성시키고 사고(史庫)를 보호하였다. 9세에 아버지를 잃자 출가할 뜻을 품고 10세에 화산(華山)에 들어가 설묵(雪默)을 스승으로 공부했고, 14세에 보창(寶唱)에게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후 경전의 공부를 시작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해전(海戰)에 참가하였고, 1615년 스승이 죽자 지리산·태백산 등에 은거하였고, 1624년 조정에서 남한산성을 쌓을 때 그에게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의 직위를 주어 승군(僧軍)을 거느리고 성을 쌓는 일을 맡게 하였는데, 3년 후에 완공하자 보은천교원조국일도대선사(報恩闡敎圓照國一都大禪師)라는 호를 주었다. 1632년에 구례 화엄사(華嚴寺)를 중수하고, 1635년 병자호란 때 의승(義僧) 3,000명을 규합하여 항마군(降魔軍)이라 칭하고 북상(北上)하던 중 강화가 성립되자 지리산으로 되돌아갔다. 1640년 쌍계사로 옮겨가 절을 수리하고, 규정도총섭(糾正都摠攝)이 되어 무주(茂州)의 적상산성(赤裳山城)에 있으면서 사고(史庫)를 보호하였다. 1646년 속리산으로 다시 돌아와 동문(同門)인 고한희언(孤閑熙彦)과 가까이 살면서 아침저녁으로 도담(道談)을 즐기다가, 고한이 화엄사로 돌아가 죽자 그도 화엄사로 들어가 여생을 보내다가 1660년에 앉은 채로 입적하였다. 저서에 도중결의(圖中決疑), 간화결의(看話決疑), 석문상의초(釋門喪儀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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