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도賈島, 가도家道, 가도家塗, 가도고문賈島敲門, 가도려과賈島驢跨
❍ 가도[椵島] 평안북도 철산군(鐵山郡)에 백량면에 속하는 섬으로, 피도(皮島)라고도 한다. 철산의 남쪽 47리에 있으며, 만주(滿洲)와 접경인 곳이다. 1623년 명나라에서 모문룡(毛文龍)에게 도독(都督)직을 내리고 가도에 도독부를 설치하였다. 1629년 요동 경략(遼東經略) 원숭환(袁崇煥)이 영원(寧遠) 앞바다에서 모문룡을 죽이자, 유격장군 진계성이 모문룡을 대신해서 그 무리를 이끌었다. 유흥치는 만주에서 가도로 도망왔는데 진계성과 뜻이 맞지 않자 1630년 진계성을 죽이고 가도를 차지하였다. 이에 조선 조정에서 유흥치가 진계성을 살해한 것은 명나라에 반역하는 짓이라고 여겨, 가도 정벌을 결정하였다. <국역 만기요람 군정편5 가도시말(椵島始末)>
❍ 가도[可道] 말할 수 있다. 노자(老子) 도덕경(道德經) 1장에 “도라고 명명할 수 있는 도라면 그것은 항상 불변하는 도가 아니요, 이름으로 표현할 수 있는 이름이라면 그것은 항상 불변하는 이름이 아니다.[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라고 하였다.
❍ 가도[賈島] 가도는 당(唐) 나라 때의 시인으로 범양(范陽: 지금의 北京市북경시 부근) 사람이다. 자는 낭선(浪仙)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승려가 되어 법명(法名)을 무본(無本)이라 했으나, 시로 한유(韓愈)에게 인정받았고, 한유의 권면으로 환속하여 그에게 시문을 배웠다. 문종(文宗) 때에 장강(長江: 지금의 四川省사천성 蓬溪縣봉계현) 주부(主簿)가 되었으며, 이로 인해 가장강(賈長江)이라고 불린다. 시를 지을 때에 매우 고심하여 글자 한 자도 빈틈없이 사용하는 시인으로 유명했다. 그의 시는 격조가 맹교(孟郊)와 비슷하여 “맹교의 시격은 청한하고, 가도의 시격은 수척하다.[郊寒島瘦교한도수]”라고 칭해진다. 당재자전(唐才子傳)에 소전(小傳)이 있으며, 시집으로 장강집(長江集)이 전한다. 그의 시 제이응유거(題李凝幽居)의 “새는 못가의 나무에 깃들이고 중은 달 아래 대문을 두드린다.[鳥宿池邊樹 僧敲月下門]”라는 구절에서, 퇴고(推敲)라는 말이 유래하였다.
❍ 가도[賈島] 당대(唐代)의 시인으로 자는 낭선(浪先·閬先)이고 범양(范陽 지금의 북경北京 대흥大興) 사람이다. 출가해 승려였을 때의 법호는 무본(無本)이었다.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당시 낙양에서는 승려의 오후 외출을 금지하고 있었는데, 가도의 시적 재능을 간파한 한유(韓愈)가 가도에게 시를 가르치고 환속시켜 과거를 보게 했다고 한다. 가도는 한유의 권고를 받아 완성한 시구를 두고 “두 구절을 얻는 데 삼 년이 걸렸고, 한 번 읊고서 눈물을 흘렸다.[二句三年得, 一吟雙淚流.]”라고 하였다. 과거에 응시했으나 여러 차례 낙방을 거듭하다가 생애 후반기인 문종(文宗) 개성(開成) 연간에 이르러서야 장강현(長江縣) 주부와 보주(普州) 사창참군(司倉參軍)을 지내다 임지에서 병으로 세상을 떴다. 소식(蘇軾)은 제유자옥문(祭柳子玉文)에서 “원진(元稹)은 경조부박하고 백거이(白居易)는 비천 저속하며, 맹교의 시는 한산(寒酸)하여 살풍경하고, 가도의 시는 살은 없이 뼈만 앙상하다.[元輕白俗, 郊寒島瘦.]”라고 하여 가도를 동시대의 맹교와 함께 음고(吟苦)에서 명성을 이뤄낸 시인으로 평가했다. 문집으로 장강집(長江集) 10권이 있다.
❍ 가도[可度] 조선 초기 대표적 화가인 안견(安堅)의 자이다. 또 다른 자는 득수(得守)이며, 호는 현동자(玄洞子) 또는 주경(朱耕)이고, 본관은 지곡(池谷)이다.
❍ 가도[家道] 가정의 도덕을 말한다. 주역(周易) 가인괘(家人卦) 단사(彖辭)에 “아비가 아비답고 아들이 아들답고 형이 형답고 아우가 아우답고 남편이 남편답고 아내가 아내다워야 가도(家道)가 바르게 되니, 가정이 바르게 되어야 천하가 안정되리라.[父父子子·兄兄弟弟·夫夫婦婦而家道正, 正家而天下定矣.]”라고 하였다.
❍ 가도[家塗] 집안 형편이다. 안씨가훈(顔氏家訓) 종제(終制)편에 “집안 형편이 어렵고 빠듯하다.[家塗空迫]”고도 하고, 한편 “집안 형편이 가난하고 구차해졌다.[家道罄窮]”고도 하였는데, 이때 家塗(가도)와 家道(가도)는 모두 집안 형편을 이른다.
❍ 가도[家道] 집안의 재산이나 집안 형편을 일컫는 말이다. 호식옥(胡式鈺)의 두존(竇存) 4에 “집안의 재물[家資]을 가도(家道)라 한다. 육사형(陸士衡)이 백년가(百年歌)에서 ‘자손은 창성하고 집안의 재물은 풍성하다.[家道豐]’라고 한 것이나, 顔氏家訓(顔氏家訓)에서 운운한 것은, 주역(周易) 가인(家人)에서 ‘남편은 남편답고 아내는 아내다우면, 가도(家道)가 바르게 된다.[夫夫婦婦而家道正]’라고 한 것과는 다르다.”라 하였다.
❍ 가도경궁[家道罄窮] 집안 형편이 가난하고 구차해졌다. 가도(家塗) 집안 형편을 이른다.
❍ 가도고문[賈島敲門] 가도는 중당(中唐)의 시인으로 승려가 되었다가 뒤에 환속(還俗)했는데, 그가 하루는 나귀를 타고 도성(都城) 거리를 나갔다가, ‘승고월하문(僧敲月下門)’이라는 시구를 짓고는 혼자 손짓을 하면서 퇴(推) 자를 쓸까, 고(敲) 자를 쓸까 하고 수없이 고심하다가, 마침 당시 경조윤(京兆尹)이던 한유(韓愈)의 행차를 만나서 한유에게 그 사실을 갖추 말하자, 한유가 그에게 고(敲) 자가 더 좋다고 말해 주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로, 전하여 가도의 문을 두드린다는 것은 곧 시를 짓는 데 있어 제자리에 꼭 알맞은 글자를 놓으려고 고심하는 것을 의미한다. 퇴고(推敲).
❍ 가도공박[家塗空迫] 집안 살림이 쪼들리다. 집안 형편이 어렵고 빠듯하다. 가도(家塗) 집안 형편을 뜻한다.
❍ 가도려과[賈島驢跨] 가도는 당(唐) 나라 때의 시인(詩人)이다. 처음에 중이 되었다가 뒤에 환속(還俗)하였다. 그는 한창 시상(詩想)에 잠겼을 적에는 아무리 공경(公卿) 같은 귀인을 만나도 알지 못하고 지나치고는 하였는데, 하루는 경조윤(京兆尹)을 길에서 만났는데도 나귀에 탄 채 피하지 않았다가 책망을 듣고 한참 만에야 풀려나기도 하였다. <新唐書 卷一百七六 賈島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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